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칠해본다.
색깔, 넓이, 배치된 위치마다 고유한 느낌이 있다.
손이 가는 대로 꺼내면서 내 안의 메세지를 확인한다.
이 색은 걸름망과 같은 색이다. 내 감정의 경계선이자 조심선.
무언가 앞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있으면서 꼭 바로 다음 그것을 푹 – 억압하게 되는데
그 다음의 움직임부터가 진짜 내 움직임인 것 같다. 어둡고 무겁지, 부담되고 가끔은 억울해도 이것이 내 안전핀인지도 모른다.
탄생의 색에서 사람의 색으로..., 이상적인(?) 희망을 갖고 시작하지만 그건 내 순수+어리석음이 될지도 몰라.
살색까지 중화된 상태에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게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얻어진 결과물, 깍여진 원석이라 볼 수 있다.
한줄에 여러 색이 있는 것은 한 번에 여러 개가 같이 눈에 들어왔고 그 순서이다.
제일 끝 색으로 칠하고 나면 그 감정이 일단락 마무리가 되고 다음으로 넘어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줄의 제일 끝 색은 의미가 있다.
그래도 바라는 마음 있다면... 하늘 빛, 물 빛.
내 무의식이 열리기 시작하는 색이다.
이 색을 칠한 뒤 감각들이 열리고 다른 어떤 색도 단 하나를 고를 수 없었다.
눈으로는 색깔이 다 들어오는데 내 상태에 맞는 색은 없었다. 한참을 고르다가 그나마 흰색을 선택하고 넘어갔다.
멈추고 싶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외로워서 탁해지기도 하고,
...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
그래도 믿는 건 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믿어.
그래서 내일도 믿어.
안녕, 나야.
너의 그림과 글을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펼치지도 못하고, 이사짐을 나를 때마다 여기에 차곡, 저기에 차곡 쌓아놓기만 했어. 이제야 이렇게 다시 마주하네.
20년이라는 시간터널을 지나 이 편지를 쓰는 지금, 네가 칠했던 색깔이 새롭게 다시 살아나고 있어. 그때 너는 너 자신을 색으로 표현하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을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
너는 늘 질문했지. "내 무의식의 색은 무엇일까?"라고.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색을 겹치고 흘려보내며 자신을 조금씩 그려냈어. 그 과정이 불완전했을지 몰라도, 완전함을 향해 꾸준히 나아갔어. 네가 선택했던 하늘빛과 물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골랐던 흰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의 표현이었다는 걸 나는 지금 너무도 잘 알아.
네가 적었던 마지막 글귀가 아직도 마음을 울려.
"멈추고 싶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외로워서 탁해지기도 하고…"
하지만 그 모든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도 너는 믿었지. 자신을, 그리고 느린 듯 돌고도는 과정을.
네가 내일을 믿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어. 너의 신뢰와 용기가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어.
마주볼 수 있게 해줬어.
그림 속 색 하나하나가 너의 감정과 생각의 결들이었다는 걸, 나는 이제 알아.
무거운 색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조차 너를 지탱해 준 안전망이었다는 걸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게 놀랍네. 너는 어둠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어. 그때의 그 꿈틀거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네가 흔들리면서도 끝내 멈추지 않았기에,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내가 가진 모든 색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
너는 혼자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거야. 네가 남긴 색깔들을 지닌 채 나는 더 멀리 나아갈 거야.
하늘빛과 물빛을 다시 떠올리며.
언제나 너를 믿고 사랑하는,
20년 후의 나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