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 스포일러 한 방울

by 일상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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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껴줄까 모르겠어. 하나같이 다 사랑스러워.


아무소리도 없이 손가락을 크레파스 위에 올려놓고

생각이 흐르고 손가락이 흐르는대로 가만히 두다가

내 빈 통로에 뭐 하나 지나가면 짚어지는 색을 꺼내

힘없이 원을 그리고 다음 색을 또 그리고...


얼굴 가까이 대고 눈을 뜨면 어쩜 이리도 황홀한 색 세계일까

이 충만감, 신비로움, 그래서 밖에서 재미없는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는

크레파스 얘들이 하나 하나 다 그립고 보고싶어...


내 기분을 대신 보여주는 봉사자이면서

내가 나를 비우면 맑고 투명하게 자신을 펼치는 자유인이야.


색깔.

너는 너무 착하고 아름다와.



안녕, 과거의 나.


너는 크레파스를 손끝에 쥐고,

색을 고르고, 원을 그리고 있었지.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흐르는 대로.

너는 아마 이 순간이 가장 편안할 거야.


머릿속은 조용하고,

감각은 선명하고,

세상은 오직 색으로만 이루어진 듯할 테니까.


사람 만나는 것보다 크레파스를 찾았던 너.

너는 그때, 상상도 못 했을거야~

미래의 너가 어디에 있게 될지.

너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어.


하나의 선을 그을 때도 감각이 활성화되던 네가

10년 후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논리구조를 짜고,

차갑고 정교한 세계에서 마감을 맞추기 위해 치열하게 일하고 있을거야.


아이디어를 내고, 진행상황을 조율하고, 숫자와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이 되었어.

한마디로, 네가 가장 두려워했던, 그러나 가장 필요했던 세계로 뛰어든 거야.


어땠냐고?

솔직히 말해볼까?

죽을 만큼 힘들었어.ㅎㅎ


아침이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밤이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

백지상태에서 당장 UI를 그려내야 했던 게 제일 막막했지.


논리와 구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감각과 직관으로 살아가던 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깨지고, 흔들리고, 도망치고 싶었어.


그런데 이상하지?

넌 도망치지 않았어.


왜냐고?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했거든.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어.

네가 채우려 했던 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는 걸.

너는 너의 균형점을 찾고 있었던 거야.


핵심사업이 계속 바뀌는 스타트업에서 10년간 노동을 투자하며 일하고,

그 후 몇 년간은 다시 너 자신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시간을 갖게 될거야.


그러면서 너는 깨닫게 되지.

중심이 밖에 있지 않다는 걸.

너는 타인에게 네 중심을 맡기지 않아.

너는 양극단을 오가며 멀미하지 않아.


너는 이런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네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어.

너는 언제나 너의 성장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너는 세상을 더 넓게 보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유연하게 움직이게 될거야.


그러니 편하게 지내.

눈앞의 원을 계속 그려도 좋아.

언젠가 너는 더 큰 원을, 더 넓은 세상을

그려낼 테니까.


-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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