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 [소설] 창문 너머 어렴풋이

by 일상의 봄

1. 야간 당직


크리스마스이브 야간 당직은 늘 비슷했다. 사람들은 불안과 불면,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병원으로 왔다. 누군가는 술에 취해 있었고, 누군가는 죽고 싶다는 말을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꺼내 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로 바쁜 한 해를 보낸 나는, 이제 ‘혼자 당직을 맡겨도 된다’는 평가를 받은 상태였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말했다.

“오늘은 큰일 없을 거야. 대신 사람들은 많을 거야.

애매하면 오래 생각하지 말고 바로 콜 해-”


진료실 모니터에 ‘야간 응급 내원’ 목록이 떴다.


자해 시도, 급성 불안 발작,

알코올 사용 장애, 조증 악화 의심.


차트를 하나씩 열었다. 환자의 증상은 늘 그렇듯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집중력 저하. 사고의 비약.

감정둔마와 동시에 과도한 불안.


‘... 이거, 내 얘기 아닌가.’ 무심코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혼잣말이 나왔다. 훗~ <이거 난데?>는 강의실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다.



2. 환자들의 상태


첫 번째 환자는 대학생이었다. 방에서 계속 혼잣말을 한다고 아버지가 같이 왔다.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워요. 해야 할 게 있는데, 동시에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진을 이어갔다.

“최근 수면은 어떠세요?”


“잠이 잘 안 들어요. 잠들기 직전에 생각이 폭발해요. 동시에 열 개 이상—”


Sleep : Difficulty initiating sleep

secondary to racing thoughts;

reports multiple concurrent thoughts at bedtime.


수면 : 사고가 빠르게 이어지는 상태로 인해

잠들기 어려움을 호소함.

취침 시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고 보고함.


기록하던 손을 잠깐 멈췄다. 열 개.. 나도 그 정도였다.



다음 환자는 중년 남성이었다.

“제가 지금 제 생각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현실 검증력 저하의 전형적인 표현.. 나는 질문을 하면서 약을 조정했다. 불안을 안정시키는 문구도 반복해서 말하고 차트에 기록을 남겼다.


Thought content : Patient reports uncertainty

regarding the reliability of his own thoughts.

Reality testing : Subjectively impaired per patient report.


사고 내용 :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보고함.

현실 검증 : 환자 보고에 따르면 주관적으로 저하된 상태임.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료실에 앉았다 나가는 사람보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말들이 더 많았다. 환자들이 남기고 간 문장들이 내 머릿속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는 듯했다.


3. 징후


시간은 새벽으로 기울었다. 응급 환자는 줄지 않았고, 전산 시스템은 느려졌다.

‘이 처방이 맞나?’

‘이 환자는 위험 신호를 놓친 건 아닐까?’

‘아까 내가 말한 표현은 부적절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가지가 계속 뻗어나갔다. DSM-5 진단 기준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떠올랐다. 한쪽에서는 진료를 해야 한다고 외쳤고, 다른 쪽에서는 지금 멈춰야 한다고 경고했다.

사고의 이완.

주의 집중의 현저한 저하.

자기 기능의 붕괴.


나는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지금 나를 진단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처방전을 출력하려고 엔터를 눌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은 키보드 위에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할 수 없다’는 감각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중 구속.. 내가 환자들에게 설명하던 개념이었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시간의 감각이 달라지는 것 같다.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해야겠다.


4. 지도교수의 판단


“잠깐, 진료 중단합시다.”

공유자료를 보던 지도교수가 급히 응급실로 내려왔다. 내 차트는 미완성이었고, 처방은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태, 본인이 느끼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집중력이 떨어져 있고, 판단 속도가 느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재빨리 이어서 말했다. “잠깐만 쉬면—”


“이건 의지 문제가 아니에요.” 이 말은 결정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내가 더 이상 통제권을 쥐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교수는 낮게 덧붙였다.

“환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차갑고도 따뜻한 이 문장을 듣는 순간, 팽팽한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5. 크리스마스의 악몽


복도를 걷는 동안, 바닥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호흡은 얕아졌고, 시야가 좁아졌다.

공황 발작 초기 증상.


진단명이 자동으로 따라붙었다. 매일 확인하던 차트를 떠올리며 나는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차트 속으로...


내가 있는 곳은 차트 안, 글자들이 움직인다.

내가 보는 곳은 차트 밖, 의사들이 움직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벽에 기대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

‘이런 환자, 오늘 나한테도 있었는데’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달랐다. 정신과 병동의 보호실. 손목과 발목이 초록색 보호띠로 고정되어 있었다. 의학적으로 필요한 조치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자극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사고가 분열적이에요.”

문 너머에서 의료진들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나는 입을 열려했지만, 말이 정리되지 않았다. 생각은 있었지만, 문장으로 나오지 않았다.


언어 산출 장애.

사고의 차단.

나는 차트 속 단어가 되었다.

잠결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렸다. 병동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너무 밝은 노래.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나는 울다가 웃었다.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문득 깨달았다.

오늘 밤, 내가 진료한 환자들 중 누군가는 나보다 멀쩡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6. 체인지


눈을 떴을 때, 이미 아침 회진은 끝나 있었다. 손목에 보호띠 대신 다른 것이 묶여 있었다. 이름/나이/코드. 차트 맨 위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성명 : 최진호

병명 : 급성 및 일과성 정신병적 장애

코드 : F23

직업 : 정신건강의학과 레지던트

입원 사유 : 급성 스트레스 반응, 사고의 분열, 현실 검증력 저하.


‘직업’ 항목을 생각하는 순간, 속이 뒤집혔다. 이제 그것은 보호 장비가 아니라, 위험 요인이었다. 커튼 너머에서 회진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인은 아직 본인의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식 부족이 있고요.” “의사라는 정체성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러나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의견은 ‘병식 결여’로, 반박은 ‘저항’으로 번역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필요하면 보호적 약물 사용하죠.”

주사기가 준비되는 소리가 났다. 투명한 액체가 천천히 차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로페리돌.

로라제팜.

용량도 알고 있다. 내가 수없이 처방하던 약이었다. “잠깐만요.”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금 이건—”


“지금은 판단 능력이 없습니다.”

그 문장은 차갑고 정확했다. 의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사가 들어왔다. 생각이 느려졌다. 문장들이 서로 붙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의사다.

의사였다.

의사였나...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병실 벽에 붙은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이었다. 반짝이는 종이 별. ‘Merry Christmas’ 라는 글자가 약물에 번지듯 흐려졌다.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지도교수가 아닌 다른 교수가 들어왔다. 이해관계가 없는 제3의 전문의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 표정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피한 채 차트만 보며 기본적인 문진을 하고 나갔다.


'상태 안정 시까지 격리 유지.'

'자해 위험성 배제 불가.'


나는 웃었다. 이제 나는,

내가 야간 당직 때 봤던 그 환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지나갔다. 병원 밖에서는 사람들의 선물이 열리고, 병원 안에서는 누군가의 정체성이 접힌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악몽이었다.

의사와 환자의 체인지.



7. 기록


퇴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증상이 안정되었고, 자해 위험성은 낮아졌으며, 현실 검증력은 회복되었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의학적으로, 나는 ‘호전’되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담당 전문의는 선의로 말했다. “충분히 쉬고, 외래 추적 보시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운을 입고, 이름표를 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첫 번째 이상은 복직 절차에서 나타났다. 행정팀 직원이 서류를 넘기다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내가 수없이 환자에게서 보아온 종류의 것이었다.

“이 부분은… 인사팀 확인이 필요하네요.”

그녀는 웃었지만, 서류는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두 번째는 진료 참여 제한이었다.

“당분간 야간 당직은 제외합시다.”

“급성 스트레스 상황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

권고였지만, 권고는 언제나 기록으로 남았다.

과거 정신과 보호 입원력 있음.

직무 스트레스 상황에서 증상 재발 가능성.


나는 더 이상 혼자 환자를 보지 않았다. 모든 판단에는 ‘확인’이 붙었다. 확인받는 의사는, 이미 온전한 의사가 아니었다.



세 번째는 동료들의 태도였다. 아무도 노골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말끝이 짧아졌고, 중요한 결정에서 내 이름은 자연스럽게 빠졌다. 회의실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 케이스는… 다른 선생님이 맡는 게 좋겠네요.”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설명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외래를 돌았다. 약을 조절하고, 말을 고르고, 환자들에게 말했다.

“지금 느끼는 혼란이,

당신 자체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차트 속 내 이름이 함께 떠올랐다.


오늘 밤에 혼자 차트를 보다가, 나는 오래된 기록을 다시 읽었다. 문장은 짧고 정확했다.


급성 분열적 증상 관찰됨.

보호 입원 시행.


그날 이후, 나는 환자를 볼 때마다 두 개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치료하는 사람의 눈과, 언제든 치료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의 눈.


크리스마스가 다시 왔다.

병원 로비에는 트리가 세워졌고, 누군가는 야간 당직을 섰다. 나는 당직표에서 내 이름이 빠진 것을 확인했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번도 완전히 원래 자리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고 환자는 퇴원할 수 있지만, 기록은 평생 퇴원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매년 찾아왔다. 창문 너머에서 캐럴이 들린다.

나는 오늘도 차트를 보며 악몽 같은 현실을 확인한다.




작품의도

‘창문 너머 어렴풋이’는

치료하는 자와 치료받는 자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환자의 언어를 기록하던 의학적 문장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단어들로 되돌아오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 소설은 누구나 현재 나의 위치에서 반대편 창문 너머에 서게 될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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