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 [소설] 하얀 나비의 꿈

크리스마스의 악몽

by 영업의신조이


Ep.23

하얀 나비의 꿈 _ 사랑이 잠에서 깨어난 자리



“눈은 언제나, 꿈보다 먼저 내렸다.”


그녀는 언제나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었다.

오후의 빛이 창을 지나 길게 바닥에 누울 때면, 레이스 가장자리의 미세한 솜털이 가벼운 숨을 쉬듯 하늘거렸다.

그 흔들림 사이로 정원에서 들고 들어온 꽃들의 향기가 서서히 방 안을 채우고... 우리는 어느새 한 계절의 무늬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곤 했다.


이브는 꽃을 사랑했다.

꽃잎 위에 앉은 나비를 보면 말없이 손끝을 내밀었고, 조심스레 숨결을 고르는 법을 배우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앞의 나비를 바라보곤 했다.

그녀의 손끝과 마디마디에는 언제나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 있었고, 햇살은 그 위를 부드럽게 비추었다.


그때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의 존재가 먼저이고, 인간이란 아름다운 한 여성의 옷을 잠시 빌려 입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나는, 오래도록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린 시절의 집 안 화단에서 시작해서 함께 다녔던 청춘의 정원들, 그리고 야외 결혼식장의 꽃향기 가득한 오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꽃을 안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내 가슴 어딘가 깊은 곳에서 미세한 날갯짓이 일었고, 주위의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분명 사랑이었으나, 사랑 하나로는 다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더 오래된 진득한 끌림, 더 밝은 쪽으로 몸을 기울게 하는 원초의 충동이었다.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오랫동안 붙이지 못한 채, 다만 그녀의 인생 한 걸음 뒤에서 반 박자 느린 템포로 한 걸음씩 뒤따라 다녔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눈이 쌓여 가던 길 위로 라디오의 캐럴이 차창을 타고 번져 나갔다. 이브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올려대며 차창 밖 눈송이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아담, 저기 봐. 하얀 눈송이들이 내려앉아 세상을 잠재우고 있어. 마치 나비의 날개 비늘처럼 얇고, 닿는 순간 사라지는... 정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 어딘가에 자리 잡은 빙판이 우리를 가볍게, 그러나 잔인하게 자동차 핸들의 반대 방향으로 밀어 올렸다.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 그리고... 정적.


금속이 옆으로 비틀려 접히는 소리가 찰나의 순간을 갈라놓았고, 깨진 유리창의 파편들이 빛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아갔다. 입안에는 오래된 녹슨 못의 떫은맛이 자리 잡았고, 차 안에는 송진과 불빛, 겨울의 냄새가 겹겹이 밀려 들어왔다. 모든 감각이 하나로 엉켜, 찰나가 선명하게 그리고 길게 이어지기만 했다.


이브의 마지막 한숨이 흰 입김으로 흘러나와 차가운 눈 덮인 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 안에는 작은 하얀 나비 브로치가 들려 있었고, 브로치는 두 번 깜박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어떤 한 번의 들숨도 이브의 밤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세상의 소리는 한 겹씩 사라져 갔다. 내 곁에 남은 것은 유리병 하나뿐이었다. 병 안에는 이브의 머리카락 한 올과, 그녀가 돌보던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병을 매만지며 한 해를 버텼고, 시간이 눈처럼 겹겹이 쌓여 언덕이 되자, 다음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다시 묘지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눈은 조용히 내렸고, 바람은 오래된 성가대의 노래처럼 낮고 길게 골짜기를 지나 이브의 묘비 표면을 어루만졌다. 젖은 흙, 차가운 돌, 멀리서 피워진 향의 잔향이 얇은 막처럼 코끝을 스쳤다. ‘이브, 하늘의 숨으로 돌아간 자.’ 묘비의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나는 유리병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병은 잠시 내 손의 온기를 빌려 김이 서리더니 곧 식어버렸다.



그 순간,

병 속의 나비가 미동도 없는 고요 속에서 기묘한 진동을 보냈다. 그 떨림은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가슴으로 번졌고, 나는 그것이 오래 잊고 있던 문장 하나를 천천히 되읽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병마개가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리며 내부 공기가 대기와 교환되었다. 바람은 멈췄고, 세상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바닐라 향수의 잔향과 겨울밤의 금속 냄새, 갓 내린 눈의 서늘한 단맛이 섞여 혀끝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하늘이 아래로 내려앉았고 땅이 위로 떠오르며 시야가 서서히 뒤집혔다. 손끝의 윤곽이 빛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가슴 안쪽에서는 심장 대신 얇은 막이 펴졌다 접히며 익숙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벼운 떨림 속에서, 나는 오래 그리워했던 무게의 그림자를 마주했다. 의식은 눈발처럼 고요히 흩어졌고, 나는 그 흩어짐의 중앙에 가만히 머물렀다.



눈이 그치고 맞은 다음 날 아침,

구름 뒤로 낮게 푸른빛이 번지듯 묘지를 비췄다. 나무 그림자가 눈 위를 천천히 그리고 얇게 그었다.


나는…

나비의 몸으로 눈을 떴다. 날개에는 지난 새벽의 차가웠던 서리의 무늬가 그대로 얹혀 있었고, 몸 전체에는 미세한 전류처럼 따스한 떨림이 흘렀다. 바람은 어제보다 덜 차가웠고, 대신 오래된 꽃집 문을 여는 듯한 마른 가지 향, 흙내음, 수많은 향의 미묘한 뒤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깨진 날이 선 병 조각이 들려 있었고, 손목에는 붉은 실이 여러 가닥 얽혀 있었으며, 입가에는 기도 같기도 체념 같기도 한 미소가 애잔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알았다.

그는 나였고, 내가 그였다는 단순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그때 바람의 결이 바뀌며 내 이름이 불렸다. 아주 낮고, 아주 가깝고, 아주 오랜 방식으로.


“아담…”

그 한 음절이 공기에서 금박처럼 부서졌다.


나는 그 목소리 쪽으로 날개를 돌렸다. 빛 속에서 레이스의 기억을 걸친 듯한 흰나비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날개는 유리처럼 투명해 움직일 때마다 주위 공기가 꽃잎처럼 반짝였고, 라벤더, 들국화, 장미, 그리고 이름 모를 겨울꽃의 향이 겹겹이 피어올랐다.


“아담, 아직도 자는 거야? 오늘은 겨울꽃이 피었어. 저수지 둑의 얼음 틈에서 노란 꽃이 올라왔대. 우리 같이 보러 가자.”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인간이던 어젯밤이 너무 선명했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손은 이미 감각조차 없었고, 빛에 반짝이는 비늘만 나풀거렸다. 심장이라 믿어온 자리에서는 날개가 일정한 맥을 만들고 있었다.

그 리듬이야말로 내가 지금 어디에, 누구로 있는지를 명확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이브, 난 밤새 사람인 줄 알고 꿈을 꿨어.

그 말이 입술을 떠나자, 바람이 떨렸고 하늘이 낮게 기울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 우리 사랑의 속삭임, 우리가 아직 그 풍경 속에 있는 듯한 꿈을… 그런데 눈을 뜨니 여긴… 우린 지금 바람의 높이에 함께 있어. 그래도 괜찮아, 이브. 네가 부르는 곳이라면… 난 어디든, 끝까지 함께 갈 거야.”


이브가 다가와 내 날개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순간, 사랑스러운 눈의 온도와 닮은 그녀의 따뜻함이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우리는 묘지의 경계에서 조용히 떠올라, 눈과 빛의 층을 가로질러 둘만의 비행을 시작했다. 아래는 위로, 위는 아래로, 모든 방향이 의미를 잃어 가며 서로의 날개가 스칠 때마다, 유리병의 입구에 부딪히던 미세한 금속성 울림이 종소리처럼 공기 속에 번져 갔다.


이 비행이 현실인지, 인간이던 시절 마지막으로 꾼 꿈의 연장선인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알 수 없음이 내 체온을 대신했고, 그 체온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이브, 우리… 이번엔 오래, 오래 꿈꾸자.”


내가 말하자 그녀는 빛 속에서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엔… 아주 오래.”


우리의 그림자는 눈 위에서 점점 엷어지더니, 경계 자체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세상은 한 번 더, 아주 조용한 잠에 들었다. 바람이 마지막 문장을 가져왔다.


“병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만은, 아직도 날갯짓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이브를 너무 그리워한 아담의 마지막 숨 이후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인간 아담의 삶을 너무 그리워한 한 마리 나비의 꿈이었을지도...


어느 쪽이든,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눈은 다시 내렸고 우리는 그 아래에서 서로의 날개가 되어 한 계절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통과해 나가고 있었다.




이브의 하얀 나비 by 영업의신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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