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음악 안에서는 끊임없이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꾸준하지도 짓누르지도 무겁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껑충거리는, 유희하는, 돌풍 같은, 버릇없는, 부단히 놀라게 하며 시작되고 다시 사라져 버리는 윙윙거림이다. 모래와 나뭇잎의 앙증맞은 소용돌이 춤을 보는 기분이다. 화창한 날의 바람, 근사한 방랑 벗이며 놀이 친구다. 활기차고 아이디어 넘치며 신나게 수다 떨다가, 때로 달리거나 춤추고 싶어했다가는, 우아함과 청춘으로 가득한 이 음악 속에서는 팔랑거리고 나부끼며 나풀거리고 한들한들하며 춤추고 폴짝거린다. 빙긋 웃고 깔깔 웃고 유희하고 놀려댄다. 일부러 심술궂었다 애틋했다 하며, 이 마법 같은 리듬을 지은 시인이 우울과 분열 증세 속에 꺼져가다 죽었다는 건 납득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음악에는 안정과 정적인 상태가, 그래, 고향이 결여되었다 할 만하다. 이 음악은 어쩌면 너무 활달하고, 지나치게 휴식을 모르며, 과하게 흩날리고 바람을 따른다. 지나치게 일렁거리는 청춘의 격정을 닮았다. 언젠가는 탈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강한 슈만의 음악, 아픈 슈만의 삶과 종말, 그 둘 사이에는 젊은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거친 익살스러움과 나이 든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중후함 사이 같은 심연이 있다. 그런데 복잡하면서 다소 감상적이기까지 한 우리 세계에서 일은 이렇게 흘러간다. 우리가 그 사랑스러운 음악가를 기다리고 있던 밤과 깊은 어둠에 대해 알면, 청춘처럼 아름다운 불안정 가운데 그토록 우아하게 흩날린 이 화창한 날의 음악은 우리에게 한층 더 매혹적으로, 한층 더 날렵하고 사랑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p102/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 북하우스)
음악에 관련해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바로 뒤이어 생모리츠에서 열린 클라라 하스킬의 연주회에서 경쾌하고 심지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숲의 정경>이 더 아름답다고 혹은 훨씬 더 좋다고. 슈만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소품 <예언하는 새>를 한 번, 아니 여러 번 더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연주회는 매우 좋았고 덕분에 자못 사적인 취향과 소망을 잊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은 기대 이상 행복했다. 열렬한 환호를 받은 예술가가 앙코르 곡을 선사했는데 오, 세상에, 다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예언하는 새>를 연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우아하고도 신비로운 작품을 다시 들으면 늘 그랬듯 언젠가 이 작품을 처음 들었던 시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이엔호펜의 집, 피아노가 있는 아내의 방이 나타났다. 연주를 하는 어느 사랑스러운 손님의 얼굴과 손이 보였다. 어둡고 슬픈 눈동자와 수염을 기른 크고 창백한 얼굴, 건반 위로 깊이 숙인 자세. 이 사랑스러운 친구이자 섬세한 음악가는 얼마 후 자살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 사멸하고 침묵하게 될 많은 것을 긴 생애 내내 끌어안고 다니는 법이다. 슬픈 눈동자를 지닌 그 음악가가 죽은 지 거의 오십 년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때론 가까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나도 <숲의 정경>의 소품 <예언하는 새>는 들을 때마다 슈만이 걸어둔 작품 고유의 마법을 넘어 기억을 불러들이는 샘이 되어 준다. 그 음악가와 그의 운명과 가이엔호펜의 피아노 방은 그런 기억의 편린일 뿐이다. 다른 많은 슈만의 음들은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울려온다. 형들과 누나들이 피아노 연주를 해준 덕분에 슈만의 소품 몇몇을 기억할 수 있다. 유년 시절 처음 본 슈만의 초상화도 잊지 않고 있다.... 유명한 예술가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주요 작품이 기록된 어린이 게임 카드 '삼중주'에 그려진 것이었다... 청소년과 서민을 위해 만든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교양 판테온을 담은 삼중주 카드, 그것이 어쩌면 훗날 시대와 문화를 아우르는 문학예술 우주 '카스탈리엔'과 '유리알 유희'에 대한 심상을 떠올리게 해 준 최초의 자극이었는지도 모른다. (1953년 <엥가딘에서의 체험>에서)
(pp.313~315 /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 북하우스)
클라라 하스킬의 1954년 레코딩이라고 하는데... 11분쯤... 하스킬이 연주하는 <예언하는 새>를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