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의 것을 평생 동안 지키고 수행한다는 일은 존경받아 마땅한 가치라 생각하지만, 헤세는 머무르지 말고 다음 단계로 계속 나아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한 가지에 안주하여 끝까지 가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내며 그 자리를 떠나고 방랑하던 자신의 삶을 그저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헤세는 그런 삶을 실험했던 것 같고, 그 과정을 글로 남긴 것 같다.
그렇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기는 하는 것 같지만, 그 깨달음을 통해 다시 새로운 삶을 다르게 살아간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순간 죽어버리는 것 같아 헤세의 여정의 결말이 석연치는 않다. 최근에서야 읽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의 결말이 그런 식인 듯하다.
마치 죽음이 최종적인 해결책인 듯... 그렇다면 ‘자살만이 해답인가?’라고 실존주의자들에게 질문한 <시지프 신화>에서의 카뮈의 질문처럼 똑같이 헤세에게 묻고 싶어지는 결말.
‘죽음’만이 구원의 길일까요?라고... 두 책을 읽은 뒤 헤세에게 묻고 싶어 진다면 나는 헤세의 뜻을 오독한 걸까?
한 가지를 평생 수행한 나르치스의 길과, 평생 방랑한 골드문트의 길 두 가지의 길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골드문트의 입장에서, <유리알 유희>에서는 나르치스의 입장에서 서술해나가고 있는데, 두 가지 길 모두, 끝에는 무언가 ‘비밀’을 깨달은 듯하다가 다른 과정 없이 바로 ‘죽음’이다.
나의 경우, 내 성향은 한 가지에 안주하고자 하는데, 어떤 알 수 없는 힘과 ‘의지’는 나를 안주하지 못하게 그 상황에서 자꾸만 밀어내는 것 같은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안주하고자 하는 성향과 뛰쳐나가고자 하는 힘이 부딪혀 갈등을 일으키고 저항의 시간을 거치지만 저항의 힘이 클수록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게 하며, 어쩔 수 없이 ‘안주’를 끝내게 만들고 만다.
적당히, 감정 없이, 타협해 살아가는 길이 ‘안주 상태’를 적당히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을 뿐. 안주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는 건 그 안에 ‘영혼이 없어 견딜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지속이었을 거다.
깊이 몰두하면 할수록, 경고하듯, 상황은 나를 그곳에서 밀어내버리고 만다.
이성의 의지는 어떤 것을 인내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일 거다.
지속하지 못한다는 건 ’ 슬럼프‘를 결국 이겨내지 못한, 낙오자인 듯 여겨지게 만들어 더욱, 포기하지 말고 지금의 것을 붙잡고 지속하라고 꾸짖는 것 같다.
내면의 충동의 힘은 나를 밀어내는데, 그 힘에 휩쓸리는 삶은 자신의 의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 너무나 가벼운 삶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명‘의 의지는 고정된 것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한 순간도 그 상태로 머물지 않고 변화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생명력이 강한 젊음의 상태가 그렇게 방황이 많은 이유가 아닐지. 그런 젊음을 한 곳에 머무르고 멈추게 하는 그 모든 일은 생명의 의지에 반하게 하는 일. 어쩌면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사람만이 젊은 시절 ’안주‘가 가능했을 거고, ’생명의 힘‘이 거세된 지금의 환경에서는 젊은이라도, 이미 늙은 사람처럼 너무 일찍 ’안정‘만을 바라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 아닐까.
오랫동안 죽어있는 것 같았던, 내 안에 깊이 묻어 있던 ’생명력‘이 깨워지는 것 같은 순간은 ’틈‘이 생기고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의 직업은 조금의 균열의 조짐까지도 알아채고 모든 틈의 가능성조차 막아야 하는 ’구조 기술사‘였다. 자신의 삶도 그렇게 철저하게, 여직원과 밥 먹는 일까지, 이런저런 말이 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거부했던, 성실한 가장, 책임감 있는 둘째 아들의 삶이었다.
아저씨가 지안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거 살려놓은 게 너야”
지안의 대답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숨을 쉬고 있더라도 죽음과 비슷한,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삶일 수 있기에...
여기서의 삶은 ’부활한 삶‘,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 에필로그에서 말한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고 말했을 때의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일 거다. 단지 숨을 쉬고 있을 뿐인 그런 삶이 아니라.
어쨌든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과제는 주어진 삶을 진짜 살아 있는 삶처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지...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늘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존재로 생성, 변화해 가며 살아가는 일.
조금의 균열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틈을 내는 일, 바람이 들어오도록 하는 일.
그래서 김연수 작가의 <진주의 결말>에서 진주는 답답하고 꽉 막힌 방에 불을 질렀고, 유리창이 깨지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꼈던 그 ’쾌감‘이 바로 진주의 내면에서 다시 생성된 생명의 힘이 아니었을까.
제주도에서 마지막 장소 ’바람의 박물관‘에 그래서 틈을 낸 건물 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은 꽉 막힌 방에서 끝나는 ’치매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이 아니라, 틈을 내어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그런 ’결말‘, 그런 ’진주의 결말‘을 김연수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
안주하고자 하는 열망은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죽음에의 충동인 지도 모르겠다.
안주하여 살고자 하지만 결국 그건 죽음에 가까운 길이고, 안주 속에서의 자신을 끝내고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죽음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 죽음을 통과해 새로운 삶을 얻어 부활하는 것,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 매 순간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 안주의 끝에 결국 영원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해방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