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니아 세상으로 연결되는 문
내가 다녔던 여자고등학교에는 넓은 운동장 너머로 울타리 없이 논이 있었고 그 위로는 다 하늘이었다. 김포공항이 가까웠던 곳이라 서쪽이었던 그 하늘에는 가끔 비행기가 떠오르는 모습이 멀리 보였고 저녁에는 노을을 매일 볼 수 있었다. 계절마다 바뀌는 논의 색깔은 환상적이었고, 미세먼지도 없던 시절이라 풍경은 늘 청명했다. 새벽에는 아무도 없는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해 아침 안개 가득한 운동장을 혼자 매일 산책했다. 시끌시끌한 학교는 적응이 안 되었고, 항상 빈 교실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이후 조용한 학교에 남아 있는 걸 좋아했고 휴일에 학교에 가는 것도 좋아했다. 오후의 빛이 길게 들어오는 조용한 복도도 분위기 있었고,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감수성이 가장 최고로 풍부했었을 시절이라 그런가 그 이후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그때만큼 행복했던 기분은 다시 느낄 수 없었던 것 같다.
학교 옥상에는 창문에 항상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작은 교실이 옥탑방처럼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대해 알려주거나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그날도 역시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옥상으로 가는 계단의 자물쇠가 열려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때 몰래 올라가 본 옥상은 내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곳이었다. 온통 하늘과 저 너머 논만 보이는 가운데 정적만이 가득하던 그곳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옥상에 있던 작은 교실에 창문에 하늘이 현실과 다른 색깔로 비치는 또 다른 세상은 환상 속의 세계처럼 보였고, 그 속에 있는 나의 모습도 마치 어느 소설이나 영화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곳을 나의 공간으로 갖고 싶었다.
어느 날 잠겨 있던 자물쇠를 뾰족한 것으로 이리저리 넣어보았더니 자물쇠가 너무 쉽게 열려버렸다. 깜짝 놀라 다시 고리를 누르니까 잠긴 것처럼 고리가 닫혔다. 잠긴 것처럼 보이지만 잡아당기면 열리는 자물쇠가 된 것이다. 그날 이후로 옥상은 나의 비밀 공간, 아지트가 되었다.
옥상에 커튼이 쳐진 창문은 내 허리보다 낮은 높이에 있었는데, 커튼으로 미쳐 가려지지 않았던 틈으로 안을 보았더니 놀라운 공간이 있었다. 창문들 중에 마침 열리는 문이 있어서, 그 문을 열고 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누군가의 서재처럼, 도서관처럼 높은 책꽂이들이 있었고, 그 안에 오래된 책들이 빼곡했고, 넓은 책상과 편안한 의자들, 그리고 한쪽 방에는 작은 개인용 화장실까지 있었다. 책들을 구경하다가 일기처럼 생긴 노트들을 발견해 살짝 꺼내 보았다. 그곳은 학교 재단 이사장님의 개인 공간이었던 것이고, 이사장님의 젊은 시절의 글이 거기 있었던 거다. 무언가 비밀을 알게 된 기분… 그때는 모험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무모한 행동들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약간의 죄책감이 생겼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자물쇠가 튼튼해져 다시 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죄의식 때문에 스스로 멈췄던 것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친구를 데리고 한 두 번인가 더 들어가 본 이후로 옥상을 드나들었던 기억은 더 이상 없다.
최근에 읽었던 <유원>이라는 책의 표지 그림에는 옥상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두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나온다. 고등학생 유원이가 옥상으로 가는 계단의 숨겨진 공간에서 종종 시간을 보내다가 같이 숨어 들어온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 아이와 옥상에 올라가는 장면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옥상으로 가는 자물쇠가 열렸을 때 나에게 그 문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통하는 '기적의 문',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니아 세상으로 연결되는 옷장과 같은 문이었고, 그 이상으로 용감하지는 못했던 사춘기 시절의 최대의 일탈, 소심한 반항이었다.
후기 : 지난 글쓰기 수업에서 여고시절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에 나온 '졸'이라는 환상의 장소와 연결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던 학교에 대한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때 분량상 적다가 삭제했던 부분에 집중하여 글을 다시 연결하여 써 보았습니다.
(2022. 8. 7. 나를 위한 글쓰기 수업에서 '잊을 수 없는 장소'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