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읽기를 몇 번 시도했다가 중단하곤 했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비롯해서,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게르트루트>, <헤세, 음악 위에 쓰다> 책까지 연달아 읽었다.
이제 <페터 카멘친트>의 차례이다.
앞부분을 읽다가 브런치에 나를 위한 글쓰기 수업에서 잊을 수 없는 장소를 주제로 적었던 글 2편을 연이어 올리게 되었다. <페터 카멘친트>라는 제목 또한 나에게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제목이기 때문에... 2편을 올린 후 3편을 이어서 적어보고 싶었다.
나를 위한 글쓰기에서 썼던 장소는 고등학교 시절이 배경이지만, 페터 카멘친트는 그보다 더 어렸던 중학교 때의 기억이다.
아니면, 여고와 같이 붙어 있었던 여중이었고, 고등학교 시절에 중학교 건물을 들어가 보았던 일이라 중학교 때라고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전후 사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휴일이라 아무도 없는 날 학교에 가게 되었었던 때의 일이었다.. 음악실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그랬는지, 그때도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창문을 통해 들어갔었던 것 같다.
친구와 함께였었는지 혼자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다면 혼자 그런 모험? 은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음악실에서 <페터 카멘친트>라는 책을 발견했던 내 모습은 '혼자'였던 거로 기억된다.
아니면 중학교 때에 친구와 함께 음악실을 찾아갔던 기억을 따라 고등학교 때에 혼자서 가보게 되었던 두 가지의 기억이 혼동되어 섞인 건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었던 그때에 음악실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이 꽂혀 있어서 황홀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 <페터 카멘친트>라는 책을 골라, 절대 '도둑질'은 아니고 잠시 빌리는 것일 뿐이라고 다짐하며 죄책감 없이 그 책을 가지고 나왔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의 내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단죄하는 마음으로 떠올리기보다는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빌려와 놓고, 책을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단 한 줄도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아마 첫 문장부터 크게 당시의 나를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예 들춰보지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하필 나는 그 책을 빌려왔을까... 당시에는 헤르만 헤세 책을 읽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고, 잘 알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제목이 그렇게 읽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제목도 아닌 것 같은데...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과정도 쉽지 않았던 거로 기억되는데, 아무튼 결국 읽지는 못하고 반납했지만 그 제목만큼은 기억에서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페터카멘친트는 그동안 읽어왔던 헤세의 책들 중 가장 처음으로 출간된 책이다.
거의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던 유리알 유희까지 읽은 다음 처음으로 되돌아가 이 책과 다시 만나게 된 일이 괜히 의미심장한 일로 느껴진다.
농담처럼 전생에 독일인이었던 것 같다고 말해왔지만... 아무튼 내 과거를 돌이켜 보면, 한국 정신보다는 독일 정신에 계속 이끌려왔던 것 같아서...
어렸을 적에 문화적으로 흡수했던 그것이 주로 독일의 것이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가려서 좋아한 것도 아닌데, 그동안 좋아했던 것들을 돌이켜보면 거의가 독일의 음악, 독일의 문학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접할 때면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을 접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여기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 더욱 심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서...
얼마 전에 슈만 평전을 읽으며, 나는 전생에 슈만이었던 게 틀림없었다고 농담을 하다가, 이제야 헤세의 여정을 따라 거의 마지막까지 도달한 이후, 다시 <페터 카멘친트> 책을 손에 들게 되어, 마치 내가 처음 썼던 책을 다시 가슴에 품고 감회에 젖는 것처럼... 오래전 음악실에서 이 책을 발견했던 우연을 마치 필연이었던 것처럼 떠올리게 되는 거다. 내 안에 헤세의 영혼이 당시에도 깃들어 있어 그것이 자신의 책을 알아보고 모험을 강행해 그 책을 품에 안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시나리오 ㅋㅋ
그런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전혀 맥락도 없이 그 책을 들고 나왔던 나의 행위를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전생이니 유전자니... 그런 걸 떠나서 이미... 평생을 걸쳐 그 문화를 흠뻑 흡수하고 작가의 글을 읽으며 수없이 재탄생해왔던 내 영혼에 독일의 것이 그만큼 많이 섞여버려 전생처럼 혼동되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수상하긴 하다. 왜 하필 그때 페터 카멘친트를 골랐던 거냐고, 알 수 없는 그 시절의 내 영혼에게 나도 묻고 싶어 지니까...
아무리 같은 '독일'이라고는 하지만 '바그너'에게서는 '나'를 발견하기 어렵고, 그런 음악적 취향은 슈만 평전을 읽으며 너무나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전생이 독일, 아니 슈만이었다고 농담했지만 정말 농담이 아닌 진담 같았기 때문에...
페터 카멘친트를 다 읽고 나면 어렸을 적의 나의 알 수 없는 끌림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단순히 '그 책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치부해 버리기 보다, 괜히 의미 부여해 보고 싶어지는 마음.
구름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잊을 수 없는 장소 2편에서 썼던 나니아 세상으로 연결되는 문, 그 옥상에서 창문에 비친 세계, 하늘과 구름이 비친 그 세계 속의 내 모습을 봤던 일이 떠올랐고... 그렇게 '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의 처음으로부터 시작되어 나의 처음으로 연결되고, 헤세의 길을 따라 거의 끝까지 다 가본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 나의 처음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며 마지막에서 다시 처음으로 회귀한 것 같은 '순환'의 원리 속에 이 상황 자체도 놓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책에 무언가 또 비밀이 숨겨 있는 걸까 궁금해지는 마음...
다 읽고 나면, 별거 없더라 코웃음 치며 비밀이 해체되어 버리는 게 두려워 어떤 우연이 이 책을 다시 읽지 못하게 방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생각은 끝없이 장황해진다.
다음은 페터 카멘친트 처음 부분에 나오는 구름에 대한 묘사이다. '구름'에 대해 이렇게나 묘사를 하다니... 유리알 유희의 결말에 이른 헤세의 정신에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하긴 하지만 (이해 부족일수도 있지만) 아무리 전생과 연관지어보려 하더라도 문장 만큼은 결코 따라 잡을 수 없을 대단한 작가이긴 한 것 같다.
"그렇지만 반짝이는 호수와 우수에 잠긴 소나무와 햇살이 비치는 바위 절벽보다도 더욱 사랑했던 것은 구름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더 구름을 잘 알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 이 세상에서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잇따면 보여 달라. 구름은 놀이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값진 것이다. 구름은 축복이고 신의 선물이자 분노이며 죽음의 힘이다. 구름은 갓난 아이의 영혼처럼 온화하고 부드럽고 평화롭다. 구름은 선한 천사처럼 아름답고 풍요롭고 베풀기를 좋아한다. 구름은 죽음의 전령처럼 어둡고 피해 달아날 수 없으며 인정사정 없다. 구름은 엷은 층을 이루며 은빛으로 떠다닌다. 구름은 금빛 테를 두르고 하얗게 웃으며 돛단배처럼 항해한다. 구름은 노랗고 붉고 푸른 색깔로 물들며 휴식을 취한다. 구름은 살인마처럼 서서히 불길하게 살금살금 다가온다. 구름은 미친 듯 돌진하는 기사처럼 곤두박질치고 으르렁거리며 질주한다. 구름은 우울한 은둔자처럼 꿈꾸며 창백한 하늘에 애처롭게 걸려 있다. 구름은 축복받은 섬 모양이 되기도 하고 축복하는 천사들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위협하는 손처럼 보일 때도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돛 같기도 하고 방랑하는 두루미와도 닯았다. 구름은 신의 하늘과 가련한 땅 사이에서, 양쪽에 모두 속하면서 인간이 동경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아름다운 비유로서 떠 잇다. 즉 구름은 지상의 꿈이다. 그 꿈속에서 땅은 자신의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한 하늘에 바싹 들이댄다. 구름은 모든 방랑과 간구와 열망과 향수의 영원한 표상이다. 구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무언가를 동경하며 소심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떠 있듯, 인간의 영혼도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갈구하며 주저하면서도 고집스럽게 걸려 있다.
오, 구름이여, 쉬지 않고 떠도는 아름다운 구름이여, 나는 철 모르는 아이였으며, 구름을 사랑하고 바라보았따. 나 역시 구름처럼 방랑하고 낯선 타향을 전전하고 시간과 영원 사이를 떠돌며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구름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이고 누이였다. 내가 좁은 골목길을 갈 때면 우리는 언제나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하며 한순간 눈과 눈을 마주 보고 멈춰 섰다. 그때 구름으로부터 배운 것들, 구름의 형태와 색깔과 특징, 구름의 유희와 윤무와 춤과 휴식 그리고 지상의 것인 동시에 천상의 것이기도 한 구름의 진기한 이야기들도 잊지 않았다." (페터 카멘친트 / 헤르만 헤세 /p22 /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