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단상
크리스마스 시대의 인간
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관념이나 주입된 욕망에 마음이 쫓겼던 대표적인 날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크리스마스'
이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었지만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부모로서 무언가를 더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고민이 되었던 날...
매년 산타 선물을 넣을 자루를 머리맡에 챙기던 아이는 중학교 1학년이 되니 어제 처음으로 자루를 찾지 않았고, 나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야 자루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자루에 몰래 넣을 선물도 준비하지도 못했다.
예전에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한참 유행하던 '바퀴 달린 운동화' 교환권을 만들어서 넣어줬던 적도 있었다.
커다란 트리가 있고, 캐럴이 흐르고, 화려하게 눈을 사로잡는 그런 곳에 가서 멋진 하루를 보내야만 할 것 같았던 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북적북적하고, 차는 막히고, 사실 전혀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날, 종교가 없음에도, 이런 날은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자정 미사라도 갔어야 했을까? 아이 손을 잡고 교회라도 한 번 가볼까? 싶은 생각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전혀 기쁘지도 않았던 날...
심지어 예수가 실제로 태어난 날은 이렇게 추운 겨울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이교의 풍습과 혼합시켜 가장 해가 짧아 태양신에게 힘을 주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던 동짓날에 '성탄절'이 접목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과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인지, 태양신을 섬기는 날인지 헷갈리기도 하는데...
왜 우리 모두는 '크리스마스'에 이토록 연연해야 하는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추억', '동심'... 이런 것들 때문이었을까?
크리스마스 하면 기억나는 알록달록한 빨간색, 초록색 등의 색깔과 포장된 선물들, 크리스마스트리, 카드, 캐럴, 산타, 썰매, 징글벨 종소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낭만적인 심성을 자극하는 그 모든 유혹들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떠올려보자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아이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르골을 사러 광화문 쪽으로 갔다가 얼떨결에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일이다. 당시 정치와 시위에 관심이 유독 많고 더불어 민주당을 지지했던 아이는 정치의식이라고는 일도 없었던 엄마 손을 이끌고 집회 현장으로 향하게 했다. 엄청나게 추웠던 날이었는데... 어린아이가 집회에 왔다고 주변 어른들이 초콜릿도 주고 기특해했다.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크리스마스이브날 결국 명동성당까지 가본 적도 있었고...
"내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는 크리스마스 때 대학 예비학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에서 서부로 돌아오던 일이다.... 또한 장갑 낀 손으로 꽉 움켜쥐었던 기다란 초록색 기차표도 아직 기억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카고, 밀위키 앤 세인트폴' 철도 회사의 칙칙한 노란색 기차들이 출입문 옆 철로 위에 멈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크리스마스 자체인 것처럼 흥겹게 느껴졌던 것이 기억난다.
역을 빠져나와 겨울밤과 진짜 눈 속으로 들어가면 옆쪽으로 눈이 흩뿌려지며 창을 배경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위스콘신 역의 흐린 불빛들이 지나가고 공기 속에는 예리하고 거친 기운이 감돌았다. 저녁을 먹은 뒤 싸늘한 연결 복도를 지나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그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다시 그 공기 속에 하나로 녹아들기 전 묘한 한 시간 동안 이 지방과 하나가 됨을 가슴 깊이 깨닫는 것이었다.
그곳이 바로 나의 중서부이다. 밀밭이나 평원 또는 사라져 버린 스웨덴 사람들의 읍이 아니라, 감격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내 젊음의 귀향 기차, 서리가 내린 어두운 밤의 가로등과 썰매의 종소리, 불 켜진 창의 불빛에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화환의 그림자가 눈 위에 비치는 곳 말이다.... 톰과 개츠비, 데이지와 조던과 나는 모두 서부 사람이었고, 어쩌면 우리는 동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함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 / 피츠제럴드/민음사/p247~248))
맨해튼 프로젝트로 핵무기 개발 계획이 진행됐던 시기 바로 전... 개츠비 등이 재의 골짜기를 지나 이동하곤 했던 지역이 맨해튼이었는데... 맨해튼이 있던 동부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들이 그리워했던 중서부의 추억에 가장 큰 이미지로 남은 것도 크리스마스인 듯하다.
<위대한 개츠비> 책을 읽었던 나에게도 기억에 남은 부분이 중서부를 묘사하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 문장만으로도 마치 나의 추억인 것처럼 그립고 가슴이 아리다.
"개츠비가 죽은 뒤 동부는 그런 모습으로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고 내 눈의 힘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뒤틀려 있었다. 그래서 푸른 연기 같은 연약한 나뭇잎들이 공중에 나부끼고, 바람이 불어와 빨랫줄에 걸려 있는 젖은 옷이 뻣뻣해질 무렵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위대한 개츠비 / 피츠제럴드 / 민음사 / p249)
당시 피츠제럴드의 눈에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뒤틀려 있는 것으로 보였던 '동부', 그곳으로부터 "세상의 파괴자"로서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위대한 개츠비> 책은 문학이 아니라 역사처럼 다가온다.
다음은 맨해튼 계획과 관련된 발언 중 나무위키 발췌이다.
"우리는 세상이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웃는 사람도, 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습니다. 저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비슈누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지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 나무위키)
삭막한 '재의 골짜기'와 대비되어, 크리스마스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묘사되는 중서부의 추억은 '동심'이고 '추억'이고 지켜야만 하는 그 무엇처럼 여겨진다.
내 아이에게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 '엄마' 입장에서도 강박이었을 거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분위기, 주입된 강박이 아닌지 생각하는 의심을 갖는 마음부터 나는 크리스마스 기분을 망치고 동심과 추억을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닐지 자학해야 할 것 같은 신성한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창밖에는 밤 사이 눈이 많이 내려서 하얗게 쌓여있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다. '생각'을 멈추고 이 순간을 즐기고 기뻐해야 할까? 아이가 잠에서 깨면 창밖을 보고 기뻐하겠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기지 못했지만 자연이 '눈'으로 대신 아이를 기쁘게 해 주어 감사한 마음이 생기려는 것도... 이미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크리스마스 회로'가 깊숙이 깔려있어 벗어날 수 없는 본능적 마음을 가져버린 '크리스마스 시대의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