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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Mar 04. 2024

선물 - 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사진 속에는 연필이 아닌 펜이 또 한 개 있다. 은행에서 방문객에게 주는 파란색 볼펜으로, 어느 은행 어느 지점이라고 찍혀 있다. 나는 그 볼펜을 은행에서가 아니라 그 은행에 다녀온 것으로 짐작되는 시인 선생님께 받았다. 10여 년 만에 문학 행사에서 마주쳐 잠시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갑자기 가방에서 꺼내 건네주셨던 것이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게 선생님은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응, 너무 반가워서.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져 말없이 내 손바닥 위의 볼펜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그때, 나의 머리 위로는 청춘의 한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인생이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잠들었던 밤들, 선생님의 시집을 함께 읽으며 친구와 약속했던 먼 미래들, 단지 바닷가 높은 바위에 기댄 채 선생님의 시구를 중얼거리기 위해 떠났던 남쪽 여행.

생각났다. 286 컴퓨터나 최선의 연필 이전에 나를 소설가로 이끌어준 중요한 한 가지. 시심이라고 불리는, 그 위험하고 아름다운 아득한 세계. 시심은 천심."

(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이 부분을 읽고 선물도 시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시인님의 글에서, 술자리에서 손에 들고 있는 만년필, 볼펜... 이런 것들 선물하는 게 버릇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왠지 그 시인님과, 작가에게 은행 볼펜을 선물한 시인님이 같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경우 은행 볼펜은 단순한 은행 볼펜이 아니고, '시인' 그 자체였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또 못 버릴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때 '은행 볼펜'은 그 자체가 '브랜드'처럼... 더 이상 흔한 '은행 볼펜'이 아닐 거라는... 그렇다면 선물도 '시'와 비슷할 것 같았다.


한편 화가 났던 건...

내가 누군가에게 '은행 볼펜'을 선물했더라면... 누군가의 마음이 뭉클하기는커녕... 욕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을 거라는 점...

누군가가 나에게 '은행 볼펜'을 주었더라면... 나는 그 은행볼펜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기 위해 소중하게 간직했을까?


작가에게도 청춘의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시인'의 선물이니... '은행 볼펜'에서 '은행'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가 보였을 거고 '청춘'을 읽었을 거고...  바로 그 '시인님'의 선물이라 더 특별했을 거다.


그렇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인이 '은행 볼펜'을 건네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뭉클하기보다 '의아함'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 같기도... 

시인의 '응 너무 반가워서'라는 말 자체는... 어떤 시보다도 함축적이지만, 들은 이의 마음속에는 무한대의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시' 자체일 듯하다.


나는 우리 아이가 선 하나 그어놓은 종이조가리 하나도 버리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랑하는 그 아이의 흔적이니까... 그러니 우리 집에는 못 버리는 물건들이 너무나 많다.

하물며 교과서들은...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아이 초등학교 3학년때의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가장 안 좋게 기억하는 선생님인데...

방학식날까지 교과서를 들고 오지 않아 알아보니... 선생님이 교과서들을 싹 다 버렸다고 하는 거다. 아이는 간직하기 원했지만 아이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아이는 무서워서 간직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마침 학교에 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학교 뒤편에 아직 수거되지 않은 교과서들이 쌓여 있는 틈에서... 비가 와서 젖기까지 한 그 책들을 하나씩 다 들어 우리 아이의 교과서를 찾아내고... 찾는 김에 아는 친구들 교과서까지 구해내고 말았는데... 다른 엄마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해주었는지 버렸는지 그 후로는 기억에 없다.

그 선생님은 교과서 뿐만 아니라 미술 작품들까지 전부 처분하셨다. 그때의 내 절망감이란... 

나에게는 아이의 모든 흔적들이 '시'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전두환이 하사한 그 많은 선물들 중에도 '시'가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대통령님이 친히 주신 거라 더욱 특별했을까? 그렇다면 그것도 '시'였을까?

아무래도... 그 '시'를 보며 시심을 느끼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 '시'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뭐였을까? 자랑스러움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선물은 어떤가...

이미 거의 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그 선물들이 뭐였는지조차... 이제는 기억할 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일 거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 소중히 여기고 간직했는데...

그 사람이 준 선물을 그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 도처에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 선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던 마음은 훼손될까?

사랑을 '소유'로 생각한다면... 그 선물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소유욕'이었을 수도 있을까? 

그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분신을 떼어주듯이 선물을 하고... 선물을 했던 사실을 잊을 수도 있는데... 나만 오래도록 소중히 그 선물을 간직하고 있다면...? 왠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을 것 같기도 한데... 이건 현대인에게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을... 동등하고 싶은 '교환의 심리' 때문일까?

내가 선물 하나를 통해 '시'를 느낄 수 있다면... 나는 풍부해지고... 선물을 준 그 사람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니...  내가 더 많은 것을 받은 건데... 심지어는 나는 선물하지 않았고, 받기만 한 건데도... 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 걸까? 이건 일반적인 '교환의 심리'와도 사실 전혀 맞지 않는 계산법인 듯하다.


나의 선물은 하찮을 테니...

나를 소중히 생각하지 못하는 마음은 '선물'에까지 감정이입되어...

내가 건네는 선물에 아무리 비싼 가격이나 눈을 현혹하는 화려한 포장을 하더라도....

상대에게 하찮게 전달될 것이라는...

그래서 내 선물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선물하지 못하는 마음...


'시인'은 무엇을 선물하더라도 '시'처럼 전달될 거라...

'은행 볼펜'을 선물해도 받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특별한 가치가 있을 테니...

질투가 생기는 걸까...


우리는 역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은행 볼펜'은 은행 볼펜일 뿐이라고 인식해야 할까...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인식하는 것을 사람들은 황당히 여기지만...

우리 삶을 더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런 왜곡이고 착각이라면...

A를 A로 인식해야 풀 수 있는 수학보다...

A를 B로, C로, D로 인식해 버리는 오해들이...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시'를 버리고 좀 더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보고 싶었던 마음보다...

'시의 마음'을 회복해야 하는 게 좋을지도... 


컵에 반쯤 담긴 물을 보고 '반밖에', '반이나'라는 차이를 인식하는 것 말고...

그 물에서 생명을 보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물 분자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체로 변하고 있을 미세한 입자들, 거기에서 우리 생명과 존재의 본질까지도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냥 반쯤 담긴 물 한잔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제대로 보는 것일 수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시'는 왜곡이나 오해나 미적 향유, 문학소녀의 감상주의가 아니라... 그 너머의 감추어진 것, 억압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글자라는 틀에 갇힌 글자 너머의... 글자로 표현되기 어려운 진짜, 정수를 보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시의 반대편에 있는 지점에 철학이  있는 걸까?

잠시 후 나는 철학 수업을 들으러 간다.

하지만 이 일은 시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시를 더 제대로, 자세히 볼 수 있는 길이라 여긴다.

'시의 마음'을 회복하는 길은... 왜곡이 아니라, 착각이 아니라, 환상이 아니라...

세상을 더 잘 보기 위한 것이라는... 

시의 길과 철학의 길이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배우고 확인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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