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예정대로였더라면 은희경 작가의 <또 못 버린 물건들> 책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라, 당연히 그쪽으로 향했을 발걸음이었다. 모임을 빠진다는 걸 못 견딜 정도로 집착인지 책임감인지가 강했으니까...
집착도 책임감도... 뭔가 잘못되었다.
'마음'이 우선이었는데...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기 위한...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리고, 집착과 책임감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인가...
어쨌든... 2월을 데드라인으로 하여 뭔가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되어 버린 것 같았던 모임들을 정리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던 삶을 일단 멈춰보아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꽉 막혀 있었던 것 같아서... 억지로 다른 것들을 끼워 넣어보아도, 도무지 닫혀버린 마음에 틈을 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속 시원히 숨쉬기 위해 다른 공기가 필요했다.
계속 소속되어 있으면 내 몸은 습관적으로 자꾸 그곳을 신경 쓰게 될 테니 단톡방까지 과감하게 나오고 작별을 고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어제저녁은 한 달에 한 번 오프로 모이는 독서모임 날이었는데...
미리 빌려놓았던 책은 무의식의 명령이었는지 쉬엄쉬엄 읽다가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은 날이 의도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음에도 마치 계산된 것처럼 모임날로 맞춰지게 되었지만...
모임에 불참하겠다고 미리 알렸기에 어제는 계획이 있었지만 계획이 없어 프리한 금요일 저녁이었다.
그런데... 모임들을 정리하면서 경험한 신기한 현상들 중 하나는...
비운만큼 다른 것들이 들어오고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다시 또 채울 거라면 비우려 했던 것의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비웠기 때문에 틈이 생긴 그곳으로 다른 것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 동네에도 이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독립서점'이 생겼는데...
수요일에 글쓰기 모임을 그곳에서 했다가, 어제저녁에 있었던 '서경식 추모 강연'에 초대받아 그 자리에 가게 된 거다.
사실... 강연도 그만 듣고 싶었다.
워낙 코로나 이후 도서관에서 하던 강의들을 죄다 신청해서 듣고 다녔던 터라...
정말 좋아하는 스승님을 만나러 가는 일이 아니라면... 이제 주입식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강의는 그만 듣고 싶었다. 강의보다는... '대화' 또는 '만남'으로 시간을 채우고 싶었다.
그래서... 강의에 가는 발걸음은... 이제 지식 흡수의 욕구보다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욕구에 이끌려야 한다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생각들과의 만남... 그동안 몰랐던 세계로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그 모든 것... 익숙한 것도 편안하겠지만 그 안에 어떤 새로움도 발견해 낼 수 없다면 식상한 반복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
사실... PPT로 진행되는 강의들에는 특히... 피로감이 느껴졌다.
강사에 의해 이미 앵무새처럼 똑같이 되풀이되는 강의는... 그 안에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은 강의일 수 있어... 내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살아서 전달되어 오지 않을 테니...
서경식이라는 분을 사실은 잘 몰랐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런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이전에 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사람은 돌아가셨지만, 내 세계에는 이제야 비로소 존재하는 사람이 된 거다.
웬만하면 책을 소장하지 않으려 하는데, 어제 <나의 서양 음악 순례>라는 책도 사 왔다.
인터넷으로 배달 주문받은 책과, 좋은 공간에서 직접 구입한 책의 느낌은 확연히 다른 듯하다.
'강의'라면 지겨워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새로운 '만남'에 대해 생각하며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사전에 미리 조사해 보지도 않았다. 그 장소에서 첫 소개팅을 하듯이 첫 만남을 가져보고 싶어서...
그리고... 햇빛이 환하던 낮에 갔던 그 장소와 저녁의 느낌은 같은 공간인데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고...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는데, 환대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그곳을 편안하고 좋다고 몸이 먼저 반응한 것 같았다.
아직은 틈이 더 필요한... 완고해진 마음상태라 그럴까... 필사되어 낭독된 '서경식의 문장들'에 매혹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먼 발걸음으로 이곳에 모이게 만든 영혼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집에 와서 서점에서 사 온 책을 펼쳐보았다.
오~ 첫 장부터 책 속에서 슈만의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FM 93.1 라디오 정만섭이 진행하는 <명연주 명음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책에서 정만섭이라는 이름을 만난 것도 처음이다. 음악 관련 책과도 꽤 오랜만의 만남이다.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오늘의 발걸음은 저 세상으로부터 온 초대에 이끌렸던 발걸음이 아니었을까...
작년에 15년만에 악기를 다시 잡고, 연주를 하게 이끌었던 힘이 돌아가신 선배님의 초대였다고 느꼈던 것처럼...
나는 책과도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지만, 나와 한 세계를 공유했었다는 공감, 연결되어 있음...
겸손한 자세로... 내 세계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세상을 더 넓게 보기 위해서였다는 이유로...주어지는 책들을 모두 다 가리지 않고 읽으려고 했지만... 마음의 이끌림에도 귀를 기울였어야 했던 거다.
은희경 책의... 외국에서 쇼핑한 물건들 이야기가 많다고 느껴졌던... 공감되지 않고 몰입되지 않던 이야기보다...
은희경 작가에게는 <새의 선물> 이후로 크게 끌리지는 않는데... 굳이 또 만나러 독서모임까지 갈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대신 나에게 온 새로운 만남들에 흥미가 생겼으니... 나는 옛 모임을 등진 배반자가 된 것 같지만, 새로운 세계로의 확장,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고... 이것도... 일종의 '디아스포라'였다고 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