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퇴직하면서 반납한 나의 명함
27세 부터 47세까지 공무원이라는 명함을 걸고 살아왔다.
한 가정의 가장이 가지는 직업은 그 가족 전체의 사회적 포지션을 대신할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부모님에겐 아들로, 와이프에겐 남편으로, 아이들에게는 아빠로써의 직업이 그들 자신에 대한 간접 평가영역에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다.
공무원이었던 나의 직업이 남들에게 소개할때 물론, 내세울 만한 정도는 당연히 아니지만, 적어도 지방에서는 밥굶지 않을 정도로 평타 정도 되는 안정적 직업군에는 속했다.
근대 내가 뜻밖에 조기 퇴직하면서 공무원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무참히 깨버렸다.
퇴직하면서 반납한 공무원증은 곧 나와 가족의 간판도 함께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후 파이어족이라 허울좋은 명함을 갖다 부쳤지만, 파이어족이라는게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지 직업하고는 어찌보면 전혀 상관이 없다. 직업적으로는 무직 백수나 다를바 없는 것이다.
퇴직하고 1년동안 10여가지의 일을 했지만, 그게 나와 가족의 명함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가다, 택배상하차, 게스트하우스 관리, 상품포장 등의 일을 명함으로 쓰기에 뭔가 부족하다. 보통 4-50대 남자의 직업이 그 사람의 명함이자 사회적 신분이라는데, 공무원 퇴직과 함께 명함을 잃어버렸다.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영화 '친구'에서 보면 선생님이 학생들 체벌주면서 일일이 아버지 직업을 물어본다. 아마도 아버지 직업을 통해 집안환경이나 가정교육 등을 유추하고 아이의 됨됨이 까지 파악할려는 숨은 의미라 할까?
실제 내가 똑같이 경험했다. 1989년 중2학년때 새마을 금고에서 지역에 가난한 학생들에게 상장과 성금을 주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당시 최고 가난했던 행운(?)으로 내가 수상자로 선발되었다. 그래서 시상식 참성을 위한 외출결재를 받고자 교무실로 갔다. 당시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몬스터같은 체육 담임선생님 나를 보자 난데없이 "너그 아부지 뭐하시노"를 시전했다. 아버지 역시 반백수여서 참 말하기 곤란한데 말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예전에는 매 학년마다 가정환경 조사부 같은 걸 적으면서 아버지 직업을 적는게 필수였다. 동시에 부모님 학력, 가정의 재산 정도도 함께 조사했다. 부모님 두분다 초등문턱에도 안 나왔지만, 대략 국졸로 높이고, 대략 직업이 없지만, 그럴싸하게 갖다 붙였다. 아버지 직업의 부재가 어린 나를 매년 곤란하게 한것이다.
내가 조기퇴직을 실행하여 반백수가 된 지금 우리 아이들이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란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어린 자식들이 이런 경우에 꽤나 곤란했을것 같다. 와이프 역시 "남편분은 무슨일 하세요?"란 질문을 받을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 또한 새로운 사회생활로 사람만날때 내 직업을 말하기 곤란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실제 일일이 설명하기 곤란할 때는 그냥 과거 직업이었던 공무원이라고 선의의(?) 거짓말로 둘러댈 때도 있었다. 와이프와 자녀들도 가끔은 아빠의 직업을 공무원이라고 속여 말할 때도 있다고 했다. 현재 공직에서 은퇴한후 특별한 직업이 없다는 말을 돌려말하기 번거롭기 때문에 속으로 뜨끔하지만 순간적으로 위기모면하는 식이다.
나 좋자고 결정한 조기퇴직으로 가족들에게 약간의 곤람함을 안겼다. 내 정체성을 찾고자 공직에서 나오니 이제는 가족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셈이 되버렸다.
새로운 명함을 마련할 때...
그래서 이제 새로운 명함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가 직감하고 있다. 지인들중 공무원이 많은데 정년이 65세로 늘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니, 나도 이에 맞추어 65세까지 쓸 명함이 필요하다. 그 명함이란게 남들한테 자랑할만한 그럴싸한 직업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숨김 없이 말할 수 있는 구색 정도만 맞추면 문제없을것 같다.
근래 일하는 시간보다 여유시간이 많아서 주2일 정도의 노동강도로 일을 한다. 일을 더 늘릴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몸쓰는 일 방면으로 여러번 지원했는데, 나이때문인지 번번히 탈락한다. 아직 힘도 평균은 쓸수 있고, 머리도 잘 기름칠해서 돌아가는 편인데, 도무지 써주질 않는다. 매번 문자지원할때 "근면 성실함, 맡은바 책임감 강함, 체력 중상이상" 보내는데, 무응답이면 일을 구걸하는것처럼 기분 상할때도 있다.
조기퇴직후 확신하는 것중 하나가 일을 완전히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확실하다. 대신 일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어야 하며, 일하고 싶을때 마음껏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하에 나와 가족들의 명함을 대신할 수 있는 약간 번듯한 일이라면 인생 두번째 명함으로 손색없을듯하다.
이런 조건들을 고려하여 제2의 명함으로 안전 강사로 결정했다. 이 역시 버킷리스트중의 하나였기에 더욱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도 가끔 일을 해나가고 있고, 자격증도 동시에 몇 군대 수강해 놓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준비중이다.
이 일이 앞으로 지루해질때까지 당분간 나의 명함을 대신할 예정이다. 앞으로 나의 직업을 물으면 "저(아빠, 아들, 남편)는 응급처치와 안전관련 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합니다. 교육대상은 작은 학교 부터 큰 대기업체까지 안전교육이 필요한 곳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실제 이 일은 매일 어떤 소속으로 얽매이기보다는 프리랜서처럼 일하고 싶을때만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일주일에 몇 번하고 하루 몇 타임하는지, 이 일로 밥벌이는 할수 있는지 묻는 것과 상관없이 이게 나의 대표 명함이 될것이다. 이 일자체도 오랫동안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고, 해보니까 정말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어서 직업 만족도도 매우 높았다. 20년간 안전관 관련한 일에 몸담았기에 제일 자신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도 되는 분야라서 더 좋기도 하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의 방향들...
지금은 이렇게 흥미있어 하는 일도 언젠가 지루해질 때가 올지 모른다.
향후 다음 명함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보고 있는데, 지인중에 부동산 소장이 있는데, 그 지인 밑으로 들어가 언젠가 부동산 중계인 일도 해볼 예정이다. 한때 공인중개사 시험을 쳐볼 요량으로 책까지 구매할 정도로 부동산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 구청에서 받은 2주 무료교육 경험에 큰 인사이트를 얻어서 지역 관광해설사도 후보군이고, 나같이 여러직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직업상담사도 관심 직업 후보들이다. 이런 일들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며, 프리랜서처럼 소속과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아야 하고 또한 명함으로서도 나름 손색없다고 생각하는 일들로 후보를 가려낸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손과 몸을 써서 하는 노동의 참 댓가를 느끼게 하는 일에는 꾸준한 관심이 있다. 청과물 시장에 과일을 나른다던지 어시장에 생선 나르는 일, 택배 상하차 등 약간 원초적인 노동으로 밑바닥 삶의 진한 향기를 느낄수 있는 일은 명함과는 별개로 힘이 있을 때까지 해보고 싶다.
또한 위와 같은 취미형 일들로는 현금흐름이 부족한 부분이 발생할수 있어, 사업소득도 꾸준히 병행해 나갈 예정이다.
더 이상의 자산을 늘릴려는 욕심은 없지만 현금흐름을 더 늘리는 일에는 항상 관심이 있다. 지금 사업소득으로 에어비앤비를 하고 있으며, 추가적으로 몇 가지 일을 구상하고 있다. 이런 사업소득분야에서 현금흐름의 대부분을 창출하고, 그 외의 일은 나의 명함과 약간의 용돈, 순수한 보람 정도만 있으면 만족한다.
조기퇴직후 내가 하는 일들의 원칙은 항상 다음과 같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들만 한다. 수익을 위해서 일을 쫒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일할때도 있고, 이삼일만 일할때도 있고, 결정은 내가한다.
일은 결코 스트레스가 아니고, 내 삶의 활력소가 되어야한다.
이런 큰 원칙을 두고 당분간 직접 할일들을 정리해보면,
안전강사 ---- 나의 명함으로 쓸 대표직업, 프리랜서로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일
일당제 알바 ---- 주 1,2일 정도 운동겸 취미겸 생각없는 단순노동
기타 사업 ---- 에어비앤비 등 몇 몇 사업을 구상하여 대부분의 현금흐름을 담당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각자 능력치와 적성에 딱 맞는 재미있는 일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것이다. 다만 아직 그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내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믿는다.
조기퇴직 후 일을 다시 할것이냐? 말것이냐?는 아주 중요한 화두이다.
현재 명함을 잃어버렸거나, 향후 명함을 잃어버릴 예정인 분들의 참고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