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약

베트남 호이안 여행기 ①
우리를 만드는 이야기

by 재원


다오 씨는 베트남 호이안 외곽에 있는 마을에서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방이 트인 넓은 작업장은 습하지만 시원했고 대나무로 촘촘히 엮은 연갈색 지붕이 해를 가려주었다. 1월 기온이 20도인 이곳은 겨울이 없고 바람이 좋아 벽이 필요 없었다.



해피 하우스


다오 씨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서 보골보골 끓어오르는 시큼한 액체를 내게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이걸 재래식으로 끓인 뒤 증기를 모아 응결시켜서 맑은술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 막걸리와 비슷한 베트남식 전통주였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술을 해피 워터, 자신의 양조장을 해피 하우스라고 불렀다.



다오씨는 거동이 부자연스러웠다. 다리 한쪽이 없기 때문이다. 허벅지부터 자신의 다리가 아니었고, 바짓단 끝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갈색 발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움직이며 들고 젓고 흔드는 동안 거침이 없었고 전반적인 움직임이 유려했다. 그의 작업장은 다리의 빈자리를 반영해 완성된 몸의 연장처럼 보였다.


시각적 인상만으로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다. 멋스러운 트로피컬 셔츠를 감색 양복바지 안으로 단정히 넣어 입은 채로 부지런히 쌀을 찌고 누룩을 나르는 60대 남성의 모습. 그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지난주 호이안으로 여행을 온 나는, 로컬의 더 깊은 면을 보여주겠다는 현지인 쿠안을 따라 ‘해피 하우스’에 왔다. 베트남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쿠안은 다오 씨가 “캄보디아 사람들을 도우러 갔던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다리를 잃게 되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도우러” 갔던 전쟁이라는 표현과 그때 쿠안이 다오 씨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그것이 내게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를 만드는
이야기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 베트남 전쟁이다. 1960년대에 시작해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이 전쟁에서 미국을 몰아낸 북베트남이 1976년 북과 남을 통일했을 때,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정권이 대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도시인과 지식인을 순수한 노동자로 개조해야 한다는 폴 포트의 기괴한 신념은 세계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다. 킬링 필드가 된 캄보디아에서 당시 200만 명 안팎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40대와 그 자식 세대가 움푹 들어가 있는 캄보디아의 특이한 인구 그래프. (출처 : UNDP, 2022)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에서 발견된 유해들 (출처 : Ilinois Holocaust Museum)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어지던 1978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공산권 내부의 국가 간에 일어난 최초의 분쟁이었다. 이것은 베트남이 캄보디아 독재 정권을 몰아내려고 벌인 선한 의도의 전쟁이었을까?


당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주의 블록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국가였다. 반면 이웃 캄보디아는 폴 포트의 폭정과 대기근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통합하고 대 베트남 건설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이 캄보디아 침공 2주 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면서, 폴 포트는 쫓겨나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나마 나은 세상을 맞게 되었다. 캄보디아인들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서는 벗어났던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를 도왔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여기서 생긴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1978)



이것은
역사의 왜곡인가?


유발 하라리는 인간 종이 자연을 지배하게 된 이유가 상상력, 즉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홍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만약에 우리가 둑을 세우면 다음번 물이 넘칠 때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고, 그 생각이 번져 공통의 믿음이 되자 사람들이 협력해서 둑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상상과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뤄 살아남은 것이 인류의 역사라는 설명이다.


어쩌면 다오 씨는 ‘숭고한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전사가 아니라, 베트남 권력자들의 팽창 욕구가 만든 희생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리를 잃고 고향에 돌아온 다오 씨의 명예를 존중해 주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이 믿게 된 ‘가상의 이야기’가 그렇게 나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말이다.


다오 씨가 담가둔 각종 과실주


그 이야기를 공유하는 마을 사람들이 그의 절룩이는 걸음걸이를 보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들을 도운 고귀한 군인’이라 믿고 바라볼 때, 그 시선의 온기는 빈 바짓가랑이를 단단하게 채워주었을 것이다.


끔찍한 시체더미와 피의 계곡에서 갓 빠져나온 젊은 청년을 다오 씨의 이웃들은 그렇게 끌어안았고, 다오 씨는 가족들과 ‘해피 하우스’에 살면서 소소한 과실주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며 서로에게 뿌리내리고 살아왔다.



<베트남 호이안 여행기 ② 아는 사람에게 주는 것>에서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혜희 아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