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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말 없는 영화와 말 많은 세상

<플로우>를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라트비아 감독 긴츠 질발로디스의 플로우(Flow)가 미국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애니메이션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370만 달러라는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이 대형 스튜디오 영화들이 주도하는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은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말 대신 감정으로


<플로우>는 인간이 사라진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검은 고양이는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물이 차오르자 필사적으로 높은 곳으로 오릅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기 상황에서 배 한 척이 흘러옵니다. 배 위에는 덩치는 크지만 순한 카피바라가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골든 리트리버, 뱀잡이 수리(새), 여우원숭이 등 여러 동물들이 하나둘 배에 타면서 뜻밖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대사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동물들은 실제 자신들의 소리를 내지만, 인간처럼 의인화된 언어나 행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과장을 배제하고 최대한 실제 동물처럼 보이도록 신경 썼다는 점이 다른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되는 요소입니다.



홍수라는 배경은 전체 이야기에 걸쳐 주인공 고양이에게 중요한 변화와 각성의 계기가 됩니다.


그토록 물을 무서워하던 고양이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동료들을 위해 물고기를 잡아오는 순간은 아마 이 영화를 본 누구에게나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크고 무서운 위기가 결국에는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도록 서로를 일깨우는 것이지요.



말의 홍수


저는 말의 홍수 때문에 숨막히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요즘은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출근길 지나는 사거리마다 증오와 분노를 담은 플래카드들이 너풀거립니다. 공원 산책을 해도 곳곳에 "-하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을 읽게 되고, 화장실에는 온갖 광고 스티커와 공익 캠페인과 낙서들이 붙어 있습니다. 자막으로 가득한 TV 프로그램이나 길가의 번잡한 간판들도 이런 피로감을 더합니다.


이런 환경에 살다가 잠시 외국에 나가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전시된 말들이 현저히 적거나, 있다 하더라도 제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플로우>를 보면서도 그런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대사 없이도 충분히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진짜 마음을 전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의 역할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얻은 작은 영감이 있어서 그 얘기를 하고 마칠까 합니다. 창작 작업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데 있어 자본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작년에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제작비 한계로 인해 원했던 스튜디오 디자인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구상했던 세트는 높이가 최소 5m, 시멘트 질감의 투박한 감옥 구조물 안에 극도로 대비되는 아기자기한 파우더룸 이미지였습니다. 하지만 세트팀에 이런 디자인을 제시하자 5배가량의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포기했지요.



넷플릭스 같은 제작비를 쓸 수 있다면 섭외도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풍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즈음 민희진 씨가 자신의 미학적 성취를 위해 대자본이 필요하다 했던 발언이 회자되면서, 과연 그런가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플로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 제작비의 2%에 불과한 예산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적은 돈으로, 발트해 동쪽의 소국 라트비아의 창작자가 독립적으로 만들어서 전 세계인들의 공감과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작품이 전 세계의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과 힘을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감독이 "여러분! 이제는 오픈소스와 기술의 발달로 혼자서 모든 걸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독립제작을 하면서 협력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의 연출 방향이나 미학적 개성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소규모를 유지하며, 블렌더(Blender) 같은 오픈소스 3D툴로 작업하여 제작비를 최소화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협력해서 독창적인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플로우>의 감독 긴츠 질발로디스


주변부의
가능성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기회는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있는 중심부는 점차 안정지향적인 생산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고 패퇴하고, 반면 주변부에서는 어려운 여건 때문에 고민하고 궁리하며 실험적인 시도를 하다가 폭발적인 성과를 이루며 힘의 중심축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영화의 초반 장면에서 검은 고양이는 자기 혼자의 모습을 물에 비춰봅니다. 하지만 긴 여정이 끝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르시시즘의 상징과도 같은 '비춰보기'가 협력의 풍경으로 바뀌는 이 장면이 저에게는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영화 <플로우>와 같은 제작 모델은 앞으로 더욱 많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품화된 대규모 프로덕션을 극복하는 개성 있는 창작자들의 협력이 만들어내는 작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작품들에 담긴 다양한 문제의식과 독특한 감성이 거센 홍수 같은 위기를 극복하는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






덧. 오스카 수상 후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 채널에 올라온 재밌는 쿠키 영상을 소개합니다.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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