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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소년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소년의 시간>을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을 뒤늦게 봤습니다. 아끼는 후배들이 의미 있게 본 작품이라고 해서 지난주 챙겨 봤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선한 사람이 끝내 악당을 징벌하고 승리하는 전형적인 카타르시스가 없습니다. 나쁜 놈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립니다. 현실에 질려서 잠시 이야기로 도피하려는 분들께는 추천 못 하겠네요.



해소감 없이 꽉 막힌 이야기가 이렇게 전세계적인 공감과 인기를 얻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어떤 답답함이나 두려움을 이 작품이 잘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소년의 시간>을 보고 나서야 인셀 커뮤니티 문제가 서구에서 심각한 사회적 질병으로 다뤄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국의 여성혐오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인셀 커뮤니티에 대해 한번 알아보고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먼저 <소년의 시간>에서 잠깐 언급되고 넘어가는 인셀 용어들에 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ER' 이야기



엘리엇 로저(Elliot Rodger)라는 남성이 있습니다.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이슬라 비스타의 한 파티장. 로저는 자신이 ‘총각 딱지를 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파티에 가서 여성들을 훑어봅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여성을 욕망하지만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던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을 증오해 왔습니다. 그는 높은 데로 올라가서 여성들을 총으로 쏘는 시늉을 합니다.


잠시 후 몇몇 여성이 파티를 즐기다가 술에 조금씩 취하자, 여성들을 실제로 난간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참석자들한테 발각됩니다. 남자들이 다가와 그를 넘어뜨리고 걷어찼습니다. 발목을 다친 로저는 파티장에서 쫓겨납니다.



그로부터 1년여 후, 5월 23일.


캘리포니아 해변 근처의 대학 캠퍼스에 활기가 넘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뜻밖의 계획을 준비해 온 남자가 있었습니다.


복수의 날.


5월 23일을 지정해 엘리엇 로저가 붙인 이름입니다. “나는 이상적이고 멋진 신사인데, 여자들은 나와의 섹스와 사랑을 거부한다. 이런 사회에 복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영상을 직접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141쪽에 이르는 긴 선언문을 적어서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세 청년을 칼로 찔러 죽인 뒤,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들의 클럽인 ‘알파 파이’의 파티장을 향합니다. 로저의 표현에 따르면 그 여학생들은 “내가 항상 원했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종류의 여자애들”입니다.


다행히 그 클럽 입구가 막혀있었고 내부에서 로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밖에 나와있던 19세, 22세 여학생들을 총으로 쏴서 살해했습니다. 그러고 자신의 검은 BMW를 몰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총을 난사하며 한 명을 더 죽인 뒤 자살합니다.


순식간에 6명을 죽이고 14명이 다친 참극이었습니다. (엘리엇 로저에 대해 상세히 취재한 abc 뉴스 기사)



이후의 과정이 더 기괴합니다.


로저의 자살 후, 그가 열렬히 활동했던 인셀 커뮤니티에서 ‘Elliot Rodger’라는 이름은 영웅이 됩니다. 그의 이름 약자를 따서 hERo라는 밈이 만들어졌고, (그들이 보기에) 남성을 차별하고 방치하는 사회에 통쾌하고 용기 있는 복수를 한 인물로 추앙받습니다.


이후 인셀 커뮤니티의 남성들은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부추기며 goER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냅니다. ER하러 간다, 즉 엘리엇 로저처럼 여성들에게 복수하러 간다는 뜻입니다. 이후 비슷한 총기난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인셀 살인범들은 대부분 엘리엇 로저라는 이름을 내세웁니다.



로저와 그 추종자들은 ‘취약한 현대 남성성(Fragile Masculinity)’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주먹을 휘둘러서라도 상대에게 지배력과 우월성을 보여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총기 난사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으므로 자신이 무가치해졌다고 믿는 남성의 세상을 향한 주먹질입니다.



하이퍼가미


인셀 커뮤니티에서는 여성들이 무조건 돈이 많고 성적 매력이 있는 남성(채드(chad)라고 부름)만을 좇고, 이런 남성과는 쉽게 섹스한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여성들이 상위 남성과 짝짓는 것은 본성이며, 이런 짝짓기에 실패하면 독신을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하이퍼가미(hypergamy)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채드’는 극소수고 여성들이 채드만 선택하면 짝짓기가 줄어든 끝에 인류가 멸망하므로, 정부나 권력기관이 여성들을 통제해 평등한 짝짓기를 강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방구석 망상으로 거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느낌이네요.)


<소년의 시간>에 지나치듯 언급되는 레드필은 이런 불공평한 세상의 ‘본질’에 눈뜬 사람들이고, 역시 대사에 잠시 언급되는 앤드류 테이트는 인셀 세계관을 설파하며 인플루언서가 되었습니다.



인셀 안에도 여러 스펙트럼이 있지만, 그중 극단적인 부류들은 여성 대상 성범죄가 만연한 사회를 환영합니다. 성범죄가 잦으니 여성들의 불안이 커지고 협상력이 떨어지며, 그래야 중위나 하위 남성에게도 짝짓기 기회가 돌아올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소년의 시간>의 주인공 제이미는 이런 섬뜩한 생각을 흡수한 아이입니다. 제이미는 성범죄를 당한 학교 친구 케이티를 위로하거나 조심스럽게 대화를 청하지 않습니다. 대신 대뜸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속마음은 이런 것이죠. ‘이제 생선이 상했으니 내 텅 빈 주머니로도 사 먹을 수 있겠군!’



위로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극우에게 음모론이 위안을 주듯, 망상이 끌어당기는 위로입니다.



정체성 위기(전형적인 남성상에 자신이 부합하지 못하는 찐따 같은 존재라고 생각되어 겪는 심리적 위축감)나 사회적 고립(자신과 타인의 삶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혹은 애착을 느끼는 인간 존재가 없는 상태)을 겪는 남성들에게 인셀 커뮤니티는 강력한 위안을 줍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 당신이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사회와 여성들 때문이지 당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위로입니다.


혼자였던 나를 구원해 주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을 느끼면, 그 커뮤니티의 망상과 폭력성은 그대로 구성원에게 흡수됩니다. 그런 언행을 더 강하게 할수록 인정받으니까요. 이것이 엘리엇 로저와 제이미들을 만들어내는 배경이 됩니다.



노리나 허츠가 쓴 <고립의 시대>에 “외로운 정신은 뱀을 본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로 요즘 세상의 여러 사회적 폭력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SNS에서 누군가 보낸 시간의 화려한 편집본을 모아보며 자신을 학대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도 비참한 존재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으로 열린 문을 더 닫게 되겠지요. 여기서 시작되는 많은 문제들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요. ☀




인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EU의 공식 기구 ‘급진주의 대응 네트워크(RAN)’에서 인셀에 대해 최초로 작성한 보고서(영문)를 참고하세요. 한글 번역본이 필요하신 분은 댓글 남겨주세요. 인셀 커뮤니티 안에서도 대다수는 폭력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는 주목할 만합니다.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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