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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나쓰

대체불가 동사들의 가치

<어떤 동사의 멸종>을 보고 나서 쓰다.

by 재원


이번 주말도 열심히 살아봐야지 하고 (정오가 다되어) 일어났지만 거실로 나오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웠다. 핑계를 대자면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어서 뭔가 보람찬 일을 시작할 흥이 안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어들게 되는 책이 있다. 좀 웃긴 책들이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게 무엇보다 글을 재밌게 쓰는 재주다. 게다가 사회과학적이고 국가과제적인 심오한 주제를 다루는데도 글이 웃긴다면 그 사람의 필력은 실로 부러울 수밖에 없다.


한승태 작가가 쓴 <어떤 동사의 멸종>이 그렇다.



한승태 작가는 앞서 <퀴닝(인간의 조건)>, <고기로 태어나서> 등의 르포 에세이에서 어선이나 축사에서 일한 경험담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던 주변부 육체노동 현장에서 일하며 꼼꼼하게 기록한 바를 바탕으로,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흡인력 넘치는 글을 써냈다.


한승태의 세 번째 책 <어떤 동사의 멸종>은 기술의 발달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콜센터, 물류센터와 건물 청소부, 대형식당 조리원 등으로 일하며 쓴 르포다. (읽었던 책에 대한 글을 올릴 때마다 “이 책이 올해의 최고의 책..” 운운하고 있어서 쑥스럽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 책이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제일 좋았다.




내 삶이 전진한다는 감각


생산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지도 못하면서 몸만 힘들게 써야 하는 일들은 차츰 기계나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사라지는 일들, 비생산적이지만 우리가 힘들게 몸을 써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주는 근원적인 충족감을 이야기한다.


다음은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다. 한승태 작가가 대형 물류센터에서 까대기(택배 상하차 노동)를 하며 겪은 바를 적었다. 분량이 길어 일부 생략해서 옮긴다.



“물류센터에서 내가 가장 놀란 점은 까대기하는 사람 중에 우울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이것이 내가 일터를 전전하는 동안 경험한 최고의 미스터리였다.


일당을 받는 육체노동은 인생을 고체화시킨다. 물류센터에선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성과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 손으로 꽉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였다. 온몸의 관절을 박살 내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작업 속에서도 그 감각, 내 삶이 전진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이곳에선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높고 험하기 때문에 일이 년 후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애태울 기운도 애초에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나면 통쾌한 노곤함과 절대적인 숙면만이 남았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까대기는 우리가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것은 미래를 방기하는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174p)



생산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여기에 글을 쓰는 일이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행위는 ‘비생산적인’ 일이다. 고생해서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드는 방송이나 글이 아주 적은 시청률이나 조회수를 기록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든 시간을 거쳐 세상에 어떤 물리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행위는 내게 성장의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그닥 뜨거운 반응까지는 없더라도 고생해서 만든 한 편의 방송이 TV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일주일에 한두 편 쓰는 글이 차곡차곡 쌓여서 백여 편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물리적인 충족감은 단순한 생산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동차보다 많아질 거라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빨래와 청소를 해주고, 핸들을 움직여 이동하는 행위는 자율주행차가, 복잡한 사고는 AI가 대체하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은 불편한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무엇과 부딪히며 성장할 수 있을까?




사람만 쓸 수 있는 것


나아가 기술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생각한다.


어제는 <파과>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배우들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예술성과는 별개로, 연출에서는 오리지널리티가 보이지 않았다. 이 액션 영화, 저 범죄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장면들을 모사해 놓은 느낌이었다. 이거야 말로 챗지피티가 잘하는 일 아닌가.


반면 <어떤 동사의 멸종>에는 작가의 대체불가한 오리지널리티가 담겨 있다. 글깨나 쓰는 어떤 지식인도 가보지 않았던 수많은 밑바닥 노동현장에서 온몸으로 밀어붙이며 끌어올린 깨달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진실하다. 이런 행위야말로 그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다.


신원이 드러나서 노동현장에 취직이 어려워졌다며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은 한승태 작가 ©시사IN


한승태는 “논픽션은 공동체의 투병기여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처럼 옳고 그름을 진단하는 글이 아니라, 환자처럼 시대의 문제를 투병하며 쓰는 글이 자신의 지향이라는 것이다.


책 전반에 흐르는 유머와 자학 개그(?)에 킬킬대다가 이런 서릿발 같은 작가적 원칙을 접하고는 자세를 곧추세웠다. 글쓰기의 측면에서도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 이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으니 알찬 주말이라 할 수 있겠다. ☀️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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