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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회피도 처세

by 재원


어린이날을 맞아(?) 저의 직장생활 소감을 써봅니다.




‘직장생활’을 떠올리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때 생각나는 첫 번째 단어는 물론 스트레스다.


나의 경우 스트레스는 일 자체가 너무 많아서, 혹은 너무 어려워서(ex. 어느 경찰서 형사과장을 반드시 인터뷰해야 해서 자꾸 엉겨보는데, 그는 방송에 나오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서 짜증이 잔뜩 난 상황..), 야외 촬영 해야 하는데 비가 잔뜩 와서, 열심히 찍어왔는데 메모리가 고장 나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K-회사원으로서 스트레스의 제1원인은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윗사람.


직장 생활을 10+a년 하며 겪은 바, 윗사람이 여러모로 좋은 사람인 경우는 드물었다. 직장의 친구들 혹은 후배들과 떠들면서 “어떻게 저 자리에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수만 번쯤 나눈 것 같다. 하지만 (노동절을 맞아) 가만 생각해보면, 인성 신경 안 쓰고 주변 사람 배려 안 하며 빠르게 달렸던 사람이 높은 성과를 내고, 그 성과가 수익을 창출하고 조직에서 인정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이런 윗사람들에 대한 내 대응은 시기별로 다양했다.


일단 최대한 싸워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고자 했다. 이런 노력은 드물게 성공했고 대부분 실패한 뒤에 감정적 외상을 얻었다. 그러면 마음을 다잡고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젊은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더 멋지고 그럴듯한 대안을 만들 수 있게 공부하고 의견을 나누는 (건전한) 대응이었다. 그러다 변화는 멀고 지치고 미래가 안 보인다 싶을 때는 그만두거나 이직을 택했다.


여러 조직을 겪다 보면 선조들이 늘 하셨던 말씀을 결국 깊이 이해하게 된다. 어디나 다 똑같애~ 라는 것. 조직의 지향과 수익 모델과 창립 시기조차 전부 다른데 어찌 이리 윗사람들은 비슷할까. (물론 내가 겪어온 K-윗사람은 대부분 비장애인 이성애자 정규직 명문대 출신 오십대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직장생활을 하며 겪는 윗사람 스트레스를 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한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 얘기를 쭉 듣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안 좋은 사람을 피하는 건 회피 방어가 아니라 처세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회피는 무조건 안 좋은 것이고 미뤄둔 문제는 결국 돌아온다는 믿음 때문에 늘 어떻게든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러느라 늘 지쳐있던) 내게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구태여 (노동절을 맞아) 조직생활의 장점을 찾아보자면 다양한 사람들을 싫든 좋든 계속 만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얼마 전 재택근무를 5년째 하고 있다는 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재택근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혼자서 일하는 상황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색하고 힘들어졌다는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조직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혼자로 지내는 게 마냥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업은 재택근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게 된다. 그런 시간에 대한 보상처럼, 노동절을 앞둔 지난 한 주 여러 선물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① 최근 직장에서 나에 대해 의도적으로 악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몰랐는데 어떤 친한 후배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알려주었다. 나는 모른 척해달라고 말했다. 후배는 자기 일처럼 속상해하며, 적극적으로 바로잡아 주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하다고 내게 말했다. 악소문이 준 상처를 치유하고도 남을 정도로 따뜻한 진심이었다.


② 그즈음 전 직장 동료였던 선배가 우연한 계기로 연락을 해왔다. 코로나 전에 봤으니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연락이 끊겼던 동안 해온 일을 들어보니 더 멋지게 살고 있었다. 이런 에너지와 기획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어떤 관계는 발효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만남이었다.



직장 생활을 10+a년 해오지 않았다면 이런 사람들을 내가 어디서 만날 수 있었을까. 잘 버텨온 덕이라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싫은 사람만큼이나) 좋은 사람도 어쨌거나 만나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과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K-윗사람을 적당히 다루고 회피할 수 있는 조향 감각만 잘 익힌다면, 앞으로의 직장생활도 썩 괜찮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구구절절한 생각을 해보며 앞으로도 노동자로서 잘 먹고살아봐야지 싶다. 이것이 5월 1일 노동절을 지나며 돌아보는 나의 소감이다. ☀︎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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