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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밤을 그만 모으는, 스텔라장

by 재원


제가 추앙하는 현생 인물을 소개하는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때 아이돌 앨범을 수집하던 이후 거의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앨범 한 장을 실물로 구입했다. 지난달 나온 스텔라장 2집 앨범이다.


나는 내가 눈앞에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주변에 덕력을 뽐내는 친구들이 많지만 내 생에 덕질은 없을 거라 단정했다. 그러던 중, 혹시 이것은 덕질일까..싶은 행위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뉴이스트나 워너원 앨범을 60장씩 사던 친구 박ㄱ씨, 박ㅅ씨 등에 비하면 여전히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지만, 이 정도면 나 역시 입덕의 문턱은 넘었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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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았는데) 내가 멜론에서 스텔라장 음악을 들어본 395,266명 중 40번째로 많이 들은 사람이었다.. (좋아요 2와 공유 0은 부끄럽지만) 온도가 99도라니 쫌 ㅁ섭..? 여하튼 3년째 내 플리의 대부분은 스텔라장의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견디며 부르는 노래


스텔라장(이하 스장)이 루프 스테이션을 써서 자작곡 <YOLO>를 부르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조회수가 이미 2백만이 넘어서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영상에서 스장은 아카펠라처럼 목소리로 반주를 만들고 코러스를 한층 한층 쌓아 올려서 완벽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묶어낸다.


댓글창에서 천재 아니냐며 난리였다. 음악이 흘러가는 와중에 적절한 소리가 적시에 나오고 제때 사라져야 하는데, 스장은 그 모든 타이밍을 알고 손을 움직였다. 뭐랄까, 단순한 천재성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실례인 것 같고 내가 볼 땐 거듭된 노력과 연습의 결과처럼 보였다.


R_002.jpg <YOLO> 루프 스테이션 연주 영상


스장 채널에는 그의 뛰어난 작곡실력과 퍼포먼스, 유머와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영상이 무심하게 여러 개 올려져 있다. 자주 올리지도 않고 가끔 장난치듯 하나씩 올라온다. 대충 흘린 잉크로 시를 쓰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 이면에 긴 시간의 노력이 숨어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천재성보다는, 어떻게 그렇게 실력을 쌓아 올릴 만큼의 긴 인내와 집중이 가능했을지가 몹시 궁금하다. 자신의 색깔이 찬란하게 빛날 때까지 수많은 시간을 매진하게 만드는 그 어떤 끌림. 그 축적의 시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R_003.jpg <L'Amour, Les Baguettes, Paris> 바이닐 수록 버전 녹음 중


스장은 중학교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이후 바칼로레아 상위 4%가량에게만 입학이 허용되는 그랑제콜 과정에 들어가서 생명공학 석사까지 마쳤다. 그러고 나서는 갈림길이었다. 이미 너무 사랑하는 음악을 할지, 긴 시간 공들인 전공의 길로 갈지 고민이 컸다고 한다.


그러다가 비슷한 고민을 해봤을 페퍼톤스 신재평 등에게 메일로 조언을 구했고, 장고 끝에 음악을 선택하고 스물세 살 때 귀국했다. 프랑스어, 영어 등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천재, 여성 이공계 석사 등 미디어가 좋아할 스토리를 다 갖췄고 이런 이력이 <문제적 남자>등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화려하게 조명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잘 모른 채로 음악만 오래 들어온 내 입장에서 먼저 느껴진 감정은 천재의 화려함이나 세상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발견하는 어둠, 자기착취, 우울, 그걸 이겨내려는 안간힘, 그러다 문득 찾아오는 낙관 같은 감정들이 음의 굽이마다 짙게 배어나왔다.


R_004.jpg 스텔라장 <밤을 모은다> Official Live Video ©GRDL


새벽 두세 시쯤, 텅 빈 컴컴한 도로를 달려 집으로 오는 길. 지난 3년여간 나는 심리적으로 막다른 길에 몰리거나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마다 차 안에서 스장의 음악을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밤이라기엔 밝아져버린

내 창가는 서글프다


이미 꼬박 새운 밤

생각과 생각을 잇는 고린

끊어질 줄을 모른다


나도 언젠간

저 별에 닿았으면 좋겠다

아득하게 빛나는

아직은 희미한 그곳에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지만

나는 꿈이 있어

지샌 밤을 모은다”


<밤을 모은다 (정규 1집, 2020)>


R_005.jpg <Reality Blue> MV


"Oh pretty lie / 먼 곳에 가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괴로운 건 두고 오면 된다고

돌아온 이곳은 / 날 반기는 Reality Blue

변함없는 공기가 / 텅 빈 나를 비웃네”


<Reality Blue (정규 1집)>


무작정 잘될거야 류의 헤픈 낙관도 아니고 대체로 지금의 힘든 상황을 핍진하게 다루는 노래들이었다. 무언가 더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닿지 않아서, 애쓰는 동안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힘든 시간을 '견디며 부르는 노래'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지친 마음을 표현한 노래를 듣는데 어디선가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사들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과 같아서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위로의 본질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이니까.


R_006.jpg 스텔라장이 십여 년간 만든 앨범들



2집의 변화


어떤 음악가들이 초기에 만들어내는 날것 그대로의 감성에 굉장히 끌렸던 적이 있다. 다이내믹 듀오나 악동뮤지션의 초기 음악들이 그랬다. 재능 있는 일반인으로 살던 시절에 아무 집착 없이 쌓은 삶에 대한 통찰이나 섬세한 관찰에서 느껴지는 밀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명세를 얻고 나면 화려함에 둘러싸여 오히려 그들의 예술적 재료가 소진된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들의 팬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아니었다.


데뷔 10년이 지나 만든 스텔라장의 2집에도 변화가 있다. 빌리 아일리시가 십 대의 우울과 공허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며 진화하듯, 스장의 음악도 진화한다는 느낌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세상에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의 한계를 깨닫고 삶의 다음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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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d already wasted too much time

난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지

Minutes and hours and days and years

분, 시간, 날, 해까지

Contaminated past full of lies

거짓말로 오염된 과거

Escape was the only option I had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어

Cause I don’t belong there

왜냐면, 거긴 내 자리가 아니니까

I got out and I’ll never stop running away

난 빠져나왔고, 다신 멈추지 않을 거야

There’s no going back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What might have been has never been so

‘있었을 수도 있는 일’은 결국 한 번도 없었던 거야

There’s no going back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Regrets are of no use

후회는 아무 소용도 없어”


<Land Of What Might Have Been (정규 2집)>


2집 앨범 일곱 번째 트랙의 이 노래는, 음악의 길을 선택하고 10년이 지나 돌아보는 회한으로 느껴진다. 전공을 버리고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로 한 건 단지 그것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어려운 학문의 길을 걷는 것이 부담스러워 도망쳤던 걸까.


이 곡은 스장의 과거가 미디어에서 포장된 어떤 단순명료한 과정은 아니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해준다.


R_008.jpg 2집 앨범 표지


2집 오프닝곡 <What Makes You?>에서는 여전히 지치는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모습이다. 나 역시 아침마다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뻐라 슬픔아>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끌어안고, <이별 amazing>에서는 누군가를 잃고 너무나 아프더라도 당신을 잃지 말라고 응원한다. 이 노래들은 듣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 또한 <News & Sames>에서는 시간이 흐르며 바뀌는 것보다 바뀌지 않는 것들로 우리 삶이 지탱됨을 이야기한다. 늘 옆에 있는 마음들과 사람이 우리가 내일을 마주할 용기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트랙에서 쿵짝대는 이 노래가 정말 좋았다.


“그땐 / 지샌 밤을 모으고 모으면

닿을 줄만 알았던 별

반짝이던 빛은 / 별이기는 했던 걸까


지금도 모르겠어 / 아니 조금은 알겠어

머나먼 별을 그리다 / 잊을 뻔했던 나


홀로 넓디넓은 / 밤을 마주해도

빛날 수 있어 / 난 행복해질까


어쩌면 그 별은 / 그리 밝지 않았는지도 몰라

나는 부풀린 꿈의 / 빛을 보고 있던 거야”


<나는 별 (정규 2집)>


처음에는 이 노래가 1집 <밤을 모은다>에 대한 답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가 열 번쯤 듣고 나니 문득 알게 됐다. 더 이상 별에 닿기를 꿈꾸며 서글퍼하는 밤을 모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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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1집 수록곡 <Villain(빌런)> 뮤비의 숏들이다. 나는 내가 본 모든 뮤비 중에 이것을 최고로 아낀다. 스장의 뮤비는 곡이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도 톤앤매너를 독특하게 유지한다. 그중에서도 <Villain> 뮤비는 노래에 담긴 촌철살인 같은 메시지와 유머러스한 정서를 비디오가 뛰어나게 시각화했다.


가사와 리듬을 창조해내는 능력, 그리고 공연에서의 퍼포먼스와 비디오 컨셉에 이르기까지. <지구는 평평> 같은 노래에서는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세상에 대한 위트 넘치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대형 홈쇼핑의 홍보곡까지 귀에 착착 감기게 만들어낸다. 스장이 자신을 잃지 않고 지금 이순간의 느낌을 영원히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덧. 스텔라장 2집 모든 수록곡은 스텔라장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2025년 5월 17~18일에는 2집 발매기념 콘서트를 연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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