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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약

사랑이라는 이름의 패치

데이팅앱 시대에 보내는 편지

by 재원


데이팅앱에 흠뻑? 빠져있다는 절친 용식이(가명)에게 띄우는 편지입니다.




식이 너는 괜찮은 외모와 스펙, 많은 연애로 단련된 말재주 때문인지 솔로인 적이 거의 없었지. 화려한 연애사로 스펙터클했던 네 인생의 삼십대 말에 화룡점정으로 등장한 데이팅 앱.


너는 앱을 통해 주말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했어. 데이팅 앱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한 소개팅 기계 같은 물건인 줄 난 몰랐어. 나 같은 내향형 인간 입장에서 그렇게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해. 그런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니...



피곤하지도 않냐는 물음에 너는 말했지. 한번 만나러 갈 때마다 이것저것 꾸미고 신경 쓰는 게 귀찮아서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만날 수 있는 오랜 내 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며 느끼는 활력과, 종종 자기한테 관심을 보이는 여성을 만날 때 얻는 우쭐함 에너지가 있다고 말이야. 하긴 그런 우쭐함은 남성들에게 밥보다 배부른 포만감을 주긴 해.


하지만 용식아, 대기만성형 카사노바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는 건 아니지? 늙어가는 처지에 없는 매력이라도 착즙해서 팔아보겠다는 의지가 귀엽지만 — 너도 알다시피 이제 과즙은커녕 쓰디쓴 녹즙이나 나오는 거 알잖아.



평소의 대화에서는 나름 공격력이 빛나는 너였지만, 이날따라 너는 나의 조롱과 냉소에 순순히 무릎을 꿇었어. 아무래도 사랑에 아쉬운 사람들은 늘 약자이기 때문이겠지.


우리의 긴 대화는 자정 즈음 술기운과 함께 사뭇 진지해졌어. 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전여친과 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매일 데이팅 앱에서 수많은 프로필을 들여다보고 적지 않은 금액을 결제하는 게 좀 문제인 것 같다고 했지.


그 데이팅 앱에 얼마를 썼다고 했더라? 100만원은 족히 넘었던 것 같은데. 결정사보다 훨씬 싸지 않냐는 너의 항변을 듣자니, 이제는 데이트도 테무처럼 하는 시대가 왔구나 싶었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여자를 만나는지? 그렇게 만나는데도 왜 제대로 된 인연을 얻지 못하는지? 라는 질문을 거듭하며 우리는 점점 인터스텔라처럼 너의 무의식을 항해하게 됐지. 그곳은 뭔가 텅 비어있고 다들 붕 떠있는 분위기였어.


너는 말했지. 지금이 결혼 적령기 혹은 살짝 지난 시점이니까 조바심이 난다고. 더 나이가 들면 시들어버린 자신을 만나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질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너는 혹시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의 패치를 붙이고 싶은 거 아닐까?


2년여를 만나던 사람과 헤어지고 마음에 상실이 있었잖아. 그걸 위로하며 새살을 돋아나게 할 시간도 없이, 밀려드는 공허함을 덮으려고 수많은 여성들의 프로필을 손끝으로 넘기며 도파민 패치를 붙이고 있는 거 아니야?


매주 새로운 여자들을 만나고, 앱 속에서 자신의 인기도를 확인하는 모습에서는 어떤 공포마저 느껴졌어. 더 나이 들면 연애 시장에서 내 가치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지금도 너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계속 누군가한테 확인받고 싶은 것 아니야?


그렇게 보면 네가 찾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울인 것 같아. 수많은 거울을 하나씩 꺼내서 비춰보는데, 너를 그대로 비춰주는 건 버리고,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멋지게 비춰주는 거울이 있으면 한참 그걸 도취해서 바라보고 있지 않니?


거기에 비친 모습도 너이긴 하지. 하지만 그 거울은 너를 반사해서 보여줄 뿐 채워줄 수는 없어.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 사회의 사랑이 점점 더 소유의 양식으로 흐른다고 했지.


멋진 사람을 소유하면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잖아.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을 함께 인생을 써내려가는 공저자로 여기는 게 아니라, 나의 가치를 채워주는 물건으로 여기는 셈이야.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신감 패치랄까.


이런 상태에서는 어느 날 진정 인연이 될 만한 괜찮은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그이가 너를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렇게 멋진 사람이 누군가의 거울에 불과한 역할에 만족할까? 자신을 소유물로만 여긴다는 느낌을 굳이 감수할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얘기하자면... 너는 데이팅 앱이 다양한 이성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그 어떤 만남 방식보다 좋다고 했어. 기회가 많다는 건 좋은 점이지만, 네가 선택항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해.


사람들은 선택항이 많아질수록 더 멋진 걸 고를 수 있다고 믿지만, 과연 그럴까?


잘 생각해보면, 선택항이 많아질수록 내가 고른 게 최선인지 의심이 커지게 돼. 고르고 나서도 다른 게 더 낫지 않았나 싶어서 자꾸 뒤를 돌아보지. 너무 여러 선택항을 헤매다 보면 기대치가 높아져서 결국 어떤 선택을 하고도 만족할 수 없는 것 같아. 결국 만족감이란 성취에서 기대치를 뺀 만큼이니까.


게다가 사람은 물건과 달라서, 여러 선택항을 짧게 관찰하면서는 발견할 수 없는 초상화적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해. 오랜 시간 어떤 대상을 집중해서 바라봤을 때 그 사람의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경험이 너도 있지 않니? 그렇게 많은 여성들을 잠깐씩 훑어보는 방식으로 외모나 조건 너머의 이면을 볼 수 있을까?



험한 사내들 사이에 이런 인정을 하긴 싫지만 너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그런 A급 주인공의 이야기에 위기가 왔으면 극복하는 대목 또한 스스로 써내려가야지. 갑작스런 등장인물로 허술하게 이야기를 때우려 하면 그건 망한 러브스토리로 남을 거라고.


나는 네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짜 감정들을 다소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너는 전에 만났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밀려들었던 공허함을 제대로 마주하고 읽어보려 한 적이 있니? 혹은 네가 직장에서 냉혹한 평가와 경쟁에 시달리며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그런 진짜 이야기들은 덮어놓고, 새로운 등장인물을 아무렇게나 등장시키면서 너의 이야기가 빛나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캠핑등을 밝혀두고 새벽까지 이어진 우리의 술자리는 늘 그렇듯 아무런 보람찬 결론도 내지 못했지만... 그렇게 한 발씩 더듬어서 자신을 알아가다 보면 썩 충만한 인간이 되어 누군가를 만날 채비를 마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찾는 느린 지름길에 나선 용식이를 응원하며. ☀︎




쓰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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