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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27. 2017

2. 중간 경유지 방콕에서의 신고식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관광객이 늘면서 새로 지은 세련된 공항에서는 좀처럼 이국적인 느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거대한 광고판 속에 낯선 조형미의 얼굴들만이 이곳이 태국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부탄에 가려면 반드시 방콕이나 카트만두 등 주변국의 도시를 거쳐야 한다. 한국에서 직항하는 비행기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의 부탄 관광객들이 거쳐 간다는 방콕으로 중간 기착지를 정했다. 그리고 기왕 방콕에 왔으니, 며칠 이 도시를 둘러보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북반구 많은 나라의 휴가철인 8월. 세계인의 관광지 방콕의 관문에는 자정이 넘었어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있는 모습은 내 인생 처음이었다. 장시간 비행과 컨디션 난조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온갖 말들이 시끄럽게 주변에서 윙윙거렸다. 바벨탑 위에 올라간 기분으로 한참 서서 입국심사를 기다렸다. 검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짙은 쌍꺼풀과 왕방울만 한 눈, 전형적인 태국인 얼굴의 입국심사관은 근엄한 표정으로 바벨탑에 들어설 자격을 심사했다. 죄진 것도 없는데 이 두근거림은 뭐람. 어쨌거나 오케이. 간단한 사인이 떨어졌고 나는 처음으로 태국 땅을 밟았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 새벽 1시



믿음직한 모건 프리먼


공항 근처에 잡아놓은 숙소로 가려면 반드시 택시를 타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공항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새벽에 들어가서 해뜰 때까지 잠깐 쉬었다 갈 요량으로 일부러 공항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의 게스트하우스를 잡아놓지 않았던가. 그런데 공항을 나서보니 그곳까지는 걸어갈 만한 길이 이어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첫 박자부터 어긋나는 여행이라니… 그나마 이어진 차도로는 이리저리 빙 돌아서 6km가량을 가야 했다. 걷기를 좋아하는 터라 ‘걸어가 말아?’ 잠깐 생각했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있던 오른손이 나를 택시 쪽으로 끌고 갔다.


태국 여행자들이 수완나품 공항에서 택시 탈 때 항상 듣는 교과서 같은 얘기가 있다. 택시 키오스크(무인 승차권 발급기)에서 발급받은 표를 절대 기사에게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 작고 하얀 종이에는 차 번호와 기사의 인적사항 등이 적혀있는데, 하도 기사들이 바가지를 씌우니 “당신들 혹시 사기당하면 나중에 여기 쓰여 있는 사람 신고하시오”하는 의도로 태국 정부가 만든 제도였다. 그러니 기사들이 어벙한 관광객들한테 그 종이를 빼앗은 뒤, 이제 됐다! 하는 심정으로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이 한국발 방콕 택시 괴담(?)의 전말이었다. 


키오스크에 가서 내가 탈 택시가 있는 구역을 안내받고, 예의 그 하얀 종이를 받아들었다. 보물단지처럼 종이를 꼭 쥐고 떨리는 마음으로 태국인 택시 기사에게 접근했다. 어둠 속에 앉아서 더위를 식히다 나를 보고 일어선 그, 아니나 다를까 인상이 꼭 사기꾼 같았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이 사람이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폴리스’같은 단순한 단어조차도 몰랐다. 한참 실랑이를 한 끝에 내 숙소 근처의 지명 한 개를 그가 알아들었는데, 그는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내 표를 낚아채려 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나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종이를 움켜쥐었다. 처음에 종이를 슬쩍 잡아당긴 그가 내 손가락의 힘을 느낀 뒤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할 줄 알구? 은근한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다시 손을 내민 뒤 이어진 그의 태국어 설명을 듣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구체적이고도 진정성 있는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여행자는 그 생명줄 같은 종이를 그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종이를 받아든 그는 뜻밖에도 자기 차로 가지 않고 키오스크 근처에 정복을 입은 태국인 여성이 앉아있는 데스크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있던 교통 안내원은 영어를 좀 했다. 


- 아저씨 어디 가요?

= 라끄라방 폴리스 스테이션 옆에 있는 숙소에 가요.

- 그 숙소 이름이 뭔데요?

= 이팅. 카페 겸 호스텔이에요. 

- 음... 이팅? 아! 이띵! 


뭔가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뤄진 것 같지만 실은 서로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많이 헤맸다. 결국 ‘이띵’이라는 그 숙소 이름을 알아들은 안내원은 멀리 앉아있던 어떤 다른 택시기사 아저씨를 불렀다. 태국어로 둘이 뭐라고 굉장히 복잡한 대화를 하는데 아마 


얘 이띵 간대


정도의 얘기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그 하얀 종이를 빼앗긴 뒤 벌거벗은 느낌이 들었던 나는 여전히 강한 경계감을 가지고 둘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 종이는 그 안내원 아주머니의 손에서 폐기되고 말았다. 이 사람들 혹시 뭔가 대형 사기를 치려는 거 아니야?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너무 피곤했으므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기사 아저씨를 따라갔다. 



모건 프리먼 아저씨



택시기사는 헐리웃 영화배우 모건 프리먼을 똑 닮은 아저씨였다. 뭔가 그 순간 내 관심법으로 보기에 그 아저씨는 왠지 푸근하고 착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해서 합리화를 했을 수도? 뭔가 크게 당한 범죄 피해자들의 이야기에는 항상 이렇게 인상이 좋은 사기꾼 남자가 첫머리에 등장하곤 하지...만.


그 아저씨는 "이름이 이띵이래. 음식. 먹는 거. 웃기지 않아요?" 아마도 이런 말들로 추정되는 태국어를 나한테 계속 건네면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개그 시도는 무산되었는데, 이유는 물론 못 알아듣고 어색하게 썩은 웃음을 짓고 있는 뒷자리 남자 때문이었다. 곧 우리는 더운 밤공기보다 꽉 막힌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나는 한 손에 구글 지도를 켜고 있었다. 어디 이상한 데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바짝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지도가 안내하는 최단 거리를 유유히 따라간 뒤 나를 이팅 카페 앞에 내려주었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미안함… 의심해서 미안해요 아저씨. 의심병은 한국인의 고질이랍니다. 한번 꼭 안아주고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태국말이 짧아서 참았다. 그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신뢰를 얻은 태국인이었다. 


택시에서 내리니 이미 시간은 새벽 세시였다. 한데 이띵 앞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이거 어쩌라는 거지? 기다린다고 했던 호스트가 혹시 잠들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며 또 진땀이 삐질삐질 나려는 찰나,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웬 예쁘장한 태국 아가씨가 옆문을 열고 나타났다. 시간이 새벽이었지만 셔츠와 치마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누구지? 내가 말문이 막혀 생각만 하는 사이, 그녀가 유창한 영어로 내게 말했다.


 “네가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걔니?”



내가 첫날 잠들었던 숙소 '이띵'



미로 같은 태국 골목길


새벽에 기적같이 나타난 그 여자 덕분에 다행히 숙소를 잘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몸살 기운 때문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눈이 일찍 떠져서 1층에 내려갔더니 예쁜 아가씨는 어디 가고 덩치가 곰 같은 아저씨가 주방을 지키고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의 손바닥만 한 큼직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내주고 새콤달콤한 망고 주스를 한 잔 따라줬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맛있었다. 아저씨의 참치 샌드위치 덕분에 회복한 약간의 기력으로 나는 다시 나머지 3박4일간 머물 숙소를 찾아 떠났다. 


여행가방들을 끌고 길을 가는데 처음에는 낯선 태국의 뒷골목 풍경이 좋아서 가다 서다 하면서 신나게 사진도 찍고 온갖 여행자 행세를 했다. 하지만 신나던 것도 잠시. 좀 더 가까이 가겠다고 들어선 골목들이 끝에서 전부 막혀있었다. 오기가 생겨서 몇 번을 더 그렇게 가까워 보이는 길로 들어갔는데 역시 다 막혀있었다. 태국 골목은 웬만해선 끝에서 다른 길과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오전 시간이지만 특유의 습덥한 날씨에 길까지 해메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다니자니 이만 주저앉고 싶었다.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하고 걷기 시작한 게 잘못이었을까. 택시를 탈까 했지만 역처럼 큰 랜드마크도 아닌 내 숙소 건물을 태국인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걷기를 한 시간 가까이 했던 것 같다. 입을 벌릴 때마다 더운 공기가 폐 속으로 파고드는 무더운 사막을 간신히 헤쳐가는 느낌. 


하지만 끝은 왔다. 교차로를 지나가자 드디어 내가 예약한 호텔 건물이 보였다.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반가웠다. 



공항철도(Airport Railway) 라끄라방 역 내부의 모습


내가 헤맸던 태국 뒷골목의 모습. 여기 보이는 녹색 가게는 일종의 빨래방이다.


안에는 이렇게 동전을 넣어 빨래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내가 3박4일간 묵었던 레지던스. 시설이 좋았는데 하루 가격은 한국돈으로 3만원 정도 밖에 안 된다.


26층에 있던 내 숙소에서 본 방콕 시내 풍경


마사지계의 마스터


커튼을 쳐 놓고 위 사진에 보이는 침대에서 두 시간인가를 달콤하게 자고 일어났다. 다시 조금 기력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아픈 게 나아야 제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예 쉴까도 생각했지만 뭔가 아까웠다. 그래서 트립어드바이저(Trip Advisor,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가 사용하는 여행 앱)에서 방콕 시내에서 가장 평이 좋은 타이마사지 샵을 찾아봤다.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방콕관광의 중심지 나나 역 근처에 가장 많은 샵이 있었다.


이름이 좀 은근해서 두근거리긴 했지만 TOUCH라는 샵이 평점이 좋아서 거길 찾아가기로 했다. 잘 찾아가서 90분동안 처음으로 진짜 타이마사지를 받아봤다. 쓰담쓰담 주물주물 때리고 밀고 당기고 하는 사이 순식간에 90분이 지났다. 결과는? 별점 다섯개를 줄만 했다. 정말 신기한 것이, 가기 전까지 계속 몸이 안 좋아서 숙소 돌아갈 때는 택시를 탈까 생각했는데, 마사지가 끝나고 나왔을 때는 ‘내가 몸이 아팠나?’ 생각할 정도였다. 방콕 가서 매일 마사지 받았다는 관광객들 글을 읽고 코웃음쳤던 게 민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태국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타이마사지를 받았는데, 다음날 타이마사지의 제왕을 만나게 됐다. 그를 이라 부르겠다. 킹은 50대 초반의 남자였는데 온화한 표정과는 달리 태국 전통 의상 속에 뭔가 헐크 같은 몸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우람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수줍음타는 아가씨처럼 내게 인사를 한 뒤, 정성스레 발을 씻겨주었다. 이윽고 본격적인 시작.


킹은 능통한 영어로 내게 계속 아프지는 않은지, 느낌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리고 내게 팔을 들어봐라, 고개를 꺾어봐라 여러 얘기를 했는데, 내가 그의 말대로 잘 움직여주면 약간 콧소리를 섞어서 예스~ 굿~ 오케이~ 이러면서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느낌이 뭔가 부끄러웠지만, 어쨌거나 그는 별점 다섯 개 만점에 열 개를 주어도 모자란 진정한 마사지의 달인이었다. 


한번 타이마사지의 효과를 본 나는 이날 과감히 120분 코스를 선택했는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 모르게 가버렸다. 제자리에서 조금씩 어긋난 채로 굳어있던 몸을 부분부분 떼어내 탁탁 털어서 다시 원래대로 붙여놓은 느낌이랄까?



킹이 일하는 마사지샵의 입구


정식 명칭은 Tonrak Thai Massage다. 일본인 마을 근처에 있다.


훗날 나는 부탄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방콕 공항에 6시간 정도 머물게 되어 다시 킹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부탄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4시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방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샵이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진심으로 아쉬웠다. 온몸에 도시생활의 피로가 켜켜이 쌓인 훗날 언젠가, 다시 방콕에 간다면 그 샵에 꼭 다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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