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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바다 Jan 23. 2018

희망의 '없음'에서 일어서기


여기 한 후배가 있다. 이름은 K. 나이는 스물넷이다. 키가 훌쩍 크고 동그란 안경이 잘 어울리는, 늘 웃는 상에 긴 생머리를 한 하얀 얼굴의 아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 간의 불화가 심했다. 중3 때는 아버지가 어머니 목을 조르는 장면을 목격한다. 부모 사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라면서 K는 제대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 혼란스러운 청소년기의 한가운데에서 끝내 부모님은 이혼했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 집을 떠났다. 남은 아버지가 동생과 K를 키웠지만, 동생이 재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 역시 그간 만나 온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렇게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는, 지난 삶의 결과로 큰 빚을 안게 된 어머니가 돌아왔다.


K는 아버지의 여자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이나, 어머니의 남자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동생과 같이 넷이서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는데 뭘 씹어 삼키는지 느낌이 없었다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열몇 살 어린아이가 겪었을 혼란스러움과 통증이 느껴져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K는 성격이 밝고 사람들한테 인기도 많은 아이로 자랐다. 음악을 하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바늘구멍을 뚫고 자기 전공자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에 입학했고, 전공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살아왔다. 내가 볼 때 K는 자기 삶에 주어진 매 순간에 충실했고 언제나 열심이었으며, 힘들어도 늘 웃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을 열고 힘든 얘기도 얼마든 털어놓을 수 있는 솔직함과 용기를 가진 씩씩한 여자였다.


따라서 나는 그가 겪는 고난의 책임을 전혀 그에게 물을 수 없다.


고통의 불가해성


하지만 고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고 온 막대한 빚으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살아온 아파트를 팔고 변두리의 작은 거처로 집을 옮겨야 했다. 그때 많이 힘들었고, 또 동시에 돈을 벌어야 했기에 다른 동기들과 같이 다음 학년으로 진학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대학생들과 달리 악기 감을 유지해야 하는 음악 전공자는 악기를 놓는 것이 치명적일 수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고 K는 음악과 전혀 무관한 돈벌이로 반년을 보냈다. 앞으로도 그의 길을 선택할 때, 돈 문제는 언제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돈이 없어서 길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동생은 또 하나의 큰 걱정거리였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의 불화나 사랑의 결핍은 반드시 어느 순간에 곪은 자리를 드러낸다. 비교적 자신을 잘 지켜온 K와 달리, 동생은 조금씩 엇나가며 그 병증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다가 근래에는 자기보다 두 배가 넘는 나이를 가진 어떤 남자와 '연애'를 한다고 했다. K는 동생과 그 남자 사이에서 벌어진 모든 문제적인 일을 우연히 알게 됐지만, 동생이 저항할까봐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다.


나는 어떤 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사는 사람에게 어떤 말이 의미 있을까. 하지만 K의 고통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지난주에 나는 K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돼서... 얼마 전에 이사 온 집을 팔고 더 좁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문득 인간이 겪는 고통의 불가해성(不可解性)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신이 욥을 괴롭힌 이유


인간 고통의 불가해성. 고통을 해석, 해결,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살면서 겪는 여러 고통을 이해하려 발버둥 치고 이겨내려 마음먹고 희망을 가져본다. 하지만 K의 경우처럼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고통의 한 복판에 내던져질 수도 있다. 심지어 그 고통의 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삶을 그만두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 필요했으리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 삶의 속성이라는 인류의 오랜 통찰을 전하기 위해, 종교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구성해 고통을 설명한다. 성서의 욥기 이야기가 그렇다. 욥은 아무 죄가 없지만 아내와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잃고 고통의 덤불에 던져진다. 이유는? 없다. 신이 그저 악마로 하여금 그를 괴롭히게 허락했을 뿐.


욥과 그의 이웃들


생각해보면 인간이 체험하는 고통이란 자연계의 순환 속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사건들의 결과일 뿐일 수 있다. 거대한 자연계에서 보자면 한 번의 허리케인이나 거대한 지진 역시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 개인에게 닥쳐온다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끔찍한 참사가 되듯이 말이다.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지구에 나타났고 사회가 구성됐으며 시간이 흘러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돈이 목적이 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싸우고 착취하고 강탈한다. 누군가는 대기업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죄 없이 시력을 잃었고 어느 가장은 타워크레인 위에서 비 오듯 땀흘리며 일하다 급하게 세운 크레인이 쓰러져 죽었다. 고개를 돌리면 세계 각지에서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 부모가 죽고 고아들이 생겨나고 팔다리를 잃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내가 당사자가 된다면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상실을 수용할 수 있을까. 누가 지은 죄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이 세계 자체가 죄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희망의 '없음'으로부터


하지만 다시 K를 생각한다. 이런 해석이 지금 고통받는 그에게 어떤 위로가 될까. 네가 겪는 그런 일들은 이 거대한 세계에서 언제든 일어날만한 일이고, 너라는 존재 역시 언제든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있다. 또한 언제든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놓을 수도 있다는 그런 말들이, 지금 고통받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고통 속에 내던져진 사람은. 희망을 버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 삶이 어떤 모습이었어야 한다는 집착 자체가 사라져야만 무언가를 잃었을 때 고통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을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이유는 없다. 내가 무심코 내디딘 발걸음에 개미 한 마리가 짓밟히듯. 굳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게 운명이라는 말 밖에는 없겠다.


그리고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각양각색의 고통을 나 역시 일부 나눠지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의 숙명을 짊어진 허약한 인간들이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것.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괴롭힐지도 모를 어떤 상실들을 겪어내야만 하는 인간의, 그나마 나은 생존법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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