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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Mar 19. 2018

언젠가 너로 인해

이 귀엽기 짝이 없는 아이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바로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 는 물론 아니고 우리 누나의 딸 되시겠다. 서연이가 벌써 다섯 살 생일을 코 앞에 두고 있다. 밤에 한두 시간밖에 안 자서 누나를 녹초로 만들었던 시기를 지나, 이제 밤에 잠도 잘 자고 밥도 슬슬 알아서 먹는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피해서 뭇 어른들을 깊이 좌절시켰던 시기를 지나 이제 '예쁜짓!' 하면 몸을 배배 꼬면서 두 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야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나는 혹시나 서연이가 깨 있을까, 쪼르르 달려와서 인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기대감을 품고 계단을 오른다. 이 아이는 삶의 피로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처방전이다.


예전에 어떤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에 어떤 지구 출신의 우주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태어난 땅을 둘러보고자 지구에 도착한다. 먹을 것이 없어 굶던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산부인과에 몰래 잠입한다. 그리고 아가들이 누워있는 신생아실에 살짝 들어가는데... 거기서 그녀는 한 아기를 몰래 흡입!! 하는 게 아니라 -_- 들어 올리더니 꼬옥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아주 행복하다는 듯 활짝 웃는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한 것이다.


예전에 이 장면을 봤을 때도 뭔가 감동적이긴 했는데 어떤 기분인지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연이를 맞이한 후, 조그마한 손을 세 손가락으로 잡고 서연이의 보폭에 맞춰 길을 걸을 때라든가, 서연이가 내 방에 달려와서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서연이가 깨 있는 시간에 늘 불이 꺼져 있는 내 방에만 산다고 믿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때, 혹은 방금까지 말괄량이처럼 떼쓰며 앙~ 울다가 순식간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쿵, 하면서 영화 속 우주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잠든 서연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클까.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많은 상처를 안고 클 수밖에 없다. 한두 명의 위너를 빼고는 무가치한 인간 취급을 받는 학교 생활을 거쳐야 하며, 대학에 가더라도 자아를 찾기보다는 돈 벌 궁리를 하며 보내야 한다. 그러고서도 이어지는 경쟁, 또 경쟁. 여성이라 겪게 되는 차별/폭력은 서연이에게 또 얼마나 많은 좌절과 위축감을 안기게 될까. 그러면서도 버텨내야 하는 삶 속에서 서연이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건강한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부디 30년 후쯤의 사회는 좀 더 나은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말 진지하게 생긴다. 삼촌도 별 능력은 없지만 아무튼 힘닿는 데까지는 애써볼게. 먹고 자고 아프기도 하는 널 보며 삼촌은 이런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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