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따라오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지금의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탓에 세상의 흐름을 간신히라도 따라잡고 살지만 이 또한 영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 하나쯤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면 그만이지만, 우리 시대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쓸모없는 취급을 받으며 묻힌다. 자기 자리에서 발버둥 치며 사느라 세상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르고 '바보같이' 살아온 사람들이 이렇게 생계마저 잃곤 한다.
강원도 동해바다의 조선업은 앞서가는 시대에 설 곳을 잃은 대표적인 업장이었다. 오징어와 명태잡이가 한창이었던 시절 나무배를 만드는 목수들과 작은 조선소는 흥성했다. 그들의 화양연화야 한때였겠지만 나머지 긴 시간 동안에도 자기 노동에 자부심을 느끼고 가족들 건사할 만큼은 노임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스며들어 가공이 어려운 목재 대신 강화 플라스틱으로 배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 그렇게 배는 뚝딱 만들어졌다. 하지만 잡아야 할 명태는 씨가 마르고 동해 바다의 오징어도 귀해졌다. 배 만드는 이들은 죄 없이 땅을 뺏겼다.
직업상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관찰하고 살면서 이렇게 시간이 슬럼화시키는 공간들을 많이 접해왔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변해가는 세상과 앞서가는 사람들한테 올가미라도 던져 묶어놓아야 했을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니, 지역과 세계 곳곳에서 인간이 옛 것과 공존하기 위해 강구해놓은 특유의 수법들을 발견하면 기쁜 마음으로 살펴보곤 했다. 그중 하나로 소개하고 싶은 곳이 바로 속초의 칠성 조선소다.
칠성조선소는 1952년에 ‘원산조선소’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열었습니다. 2017년 8월까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배를 만들고 수리하여 바다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2월 칠성조선소는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공간은 살롱, 뮤지엄, 플레이스케이프, 오픈 팩토리 네 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입간판에 적힌 설명이다. 속초 조선업의 쇠락과 함께 기능을 멈춘 조선소가 카페 겸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 지금의 <칠성조선소>다.
사람들이 머물던 공간이 밀리고 그 자리에 세련된 커피전문점이나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오는 모습은 흔하게 봐왔다.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연결이 아니라 대체였다. 쓸모를 다한 과거의 것은 틀린 것이고 새롭고 세련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옳은 것이 그른 것을 대체하며 과거의 흔적들은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한국의 도시는 항상 이렇게 과거의 싹을 자르고 새 것을 심는 방식으로 재생되어 왔다. 새 것은 자신의 독특한 색깔로 이목을 끈 것이 아니라 낯섦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익숙해지면 버림받았고, 순환의 주기가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칠성조선소의 방식은 다르다.
굴욕을 이기는 서정시
칠성조선소는 낯섦으로 관심을 끌지 않는다. 위의 기계 사진에서 보듯이 익숙한 과거의 것들을 보란 듯이 전면에 전시했다. 이 무슨 배짱인가.
옛날 나무배를 만드는 데 쓰였을 낡은 도구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곳곳에 적힌 목수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걷다 보면 아득한 시차를 느끼게 된다. 그 시차 속을 걷다가 먼 바다에 시선이 닿으면 그들이 만든 낡은 배가 힘차게 바다로 떠오르고 그 뒤에 땀을 닦고 서 있는 목수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의 삶, 가족, 아이들, 땀, 눈물, 거듭 쓴 근육의 통증, 낡은 집과 오가는 길들... 이 장소와 연결되어 있었을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어디로 갔으며 왜 사라졌을까. 문득 서정시 한 편을 읽는 듯 사무치는 감정이 일었다. 신형철은 서정시를 정의하며 내가 칠성조선소에서 느낀 감정을 적절히 설명할 문장을 썼다.
시는 엇갈림과 사무침의 화석이다. 세상과 나의 조우는 실패해야만 한다. '너무 빨리'가 세상의 시간이고 '너무 늦게'가 나의 시간이다. 그 시차가 서정일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 383p)
시간의 물살이 '너무 늦게' 달리던 목수들의 삶을 휩쓸어 간 후 우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 공간은 그렇게 우리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시적 상상력에 덧대어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을 끄는 것은 모던함이나 새로움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서정이었다.
이태원이나 강남에 글로벌 브랜드들이 만들어놓은 화려한 플래그샵에 들어가면 왠지 움츠러든다. 자본의 위세가 무언으로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세련된 사람들은 저희 제품을 씁니다.
빨리 따라오지 못하면 금세 후진 사람이 됩니다.
외로워지고 고립될 겁니다.
핫한 사람이 되겠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은 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리감만 느끼며 두리번거린다. 죄목이라면 호기심밖에 없었을 나는 세련되지 못한 죄로 괜한 굴욕을 당하고 샵을 나선다. 그리고 어느새 그 샵의 문화를 선망하게 된다. 굴욕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이다.
<칠성조선소>에서 환대의 감정을 느낀 것은 느리고 어설픈 나의 시간이 긍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세상이 너무 빠른 것이지 당신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가만히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 대화는 '옛것'만이 지금의 우리에게 꺼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옛것은 따뜻한 말을 건네며 시대를 넘어왔다.
제게 특별했던 공간을 소개하는 글묶음을 내면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욕도 굴욕도 없는, 사람에 대한 우정이 있는 장소를 찾아서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