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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Jun 30. 2024

4비트적 이해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저 멀리 천장에 붙어있는 두 마리 벌레가 보였다. 순간 공포가 느껴졌다. 어떻게 행동할지, 어떤 공격력을 가졌는지 전혀 모르는 곤충이 나의 가장 내밀한 공간에 침투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다. 구글이 최근 내게 알려준 신기능 AI 이미지 검색 실시... AI는 잠시 이렇게 저렇게 이미지를 인식한 뒤, 그것이 요즘 서울 서부와 경기권 일부에서 바글대는 러브버그라고 알려주었다.


신기하게도 기사를 몇 개 찾아보고 정체를 완전 파악하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박멸하고 창문의 모기장을 점검한 뒤, 다시 고요한 나만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을 완수하고 다시 누워서 깨끗한 천장을 바라보는데, 새삼 낯선 대상을 인식하고 분류한다는 것이 강력한 행위로 느껴졌다. 


1단계 : 위험한가? / 위험하지 않은가?하는 분류부터 제압하기 어려운가? 추가 침투 가능성이 있는가? 등등 단순한 몇 가지 OX만 거치면 된다. 모두 X가 뜨면 신속하고 경제적인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최근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서로 안 친한 사람 넷이 모여서 어쩌다 술자리를 하는데, 역시 초반에 못 참고 MBTI 토크를 했다. 참석자 넷 중 세 사람 MBTI가 세 자리씩 같았고 두 자리씩은 모두 똑같았다. 우리는 그 특징들을 이야기하며 낯선 사람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을 쉽게 해소했다. 


그런데 이런 접근 또한 몇 가지 전형화된 OX(외향이다 아니다, 감정적이다 아니다, 계획적이다 아니다 등)대상을 분류하고 이해를 마치는 일이다. 이렇게 단순한 양극단으나누면 중간의 애매한 특성들은 잘 포착이 안된다.


4비트적 이해


이런 접근을 나는 4비트적 이해라고 표현하고 싶다. 


디지털의 기본은 0과 1이다. 중간이 없다. 불이 켜진 것과 꺼진 것만 있다. 다만 0과 1을 기다랗게 중첩시키면 다양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2비트면 2^2 = 2x2 = 4가지 상태(00,01,10,11)를 표현할 수 있고, 4비트면 2^4 = 2x2x2x2 = 16가지를 표현할 수 있다. 즉 MBTI는 따지고 보면 4비트의 인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텔이 4비트 컴퓨팅을 하는 칩을 내놓은 것이 반세기 전이다. (1970년대 초 나온 최초의 상업용 CPU intel-i4004) 세상은 4비트로 담아내기엔 너무 복잡미묘한 곳이었고, 컴퓨터가 계산해야 할 비트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렇게 2024년의 컴퓨터과학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디지털 이미지가, 어떤 AI가 인간의 세계를 완벽하게 담아낸다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살짝 흐릿하게 해 놓으면 비슷한 수준일 뿐이다.



1 or 0의 세계관


4비트 컴퓨팅의 시대에 세계에는 냉전이라는 제로섬 게임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싹쓸이해 버렸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적군파가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끔찍한 테러를 일으켰다. 뭐랄까 이것은 정말.. 나와 동일하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1 or 0의 세계관이었던 셈이다.


이런 이분법은 심신 안정을 위한 무의식적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사고방식의 부작용을 체험한 뒤 생각의 다양성을 위해 애써왔다. 그리고 디지털도 아날로그적 현실에 뒤처지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하여 엄청난 비트로 현실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여전히 내향/외향, 감성/이성, 남성/여성, 장애인/비장애인 등으로 이분법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박싱(boxing)한 뒤에 더 이상 구체적인 인식을 포기하고 안전함을 느끼는 습성은 4비트 시대의 스타일을 닮아 있다. 


게다가 나쁜놈으로 분류된 러브버그는 박멸 대상이 되어 살충제를 맞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깨져서 몇년 후에 어떤 위협적인 종이 새로 나타날지 모른다고 한다. 단순한 분류가 반복되는 끝에서, 우리는 점점 완전해지고 있을까? ☀︎




자신에게 처방하는 쓰는 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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