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35m 거리에서 발사했음을 생각하면 범인의 심장 박동이나 건물의 미세한 진동만으로도 총알의 위치가 끔찍하게 바뀔 수 있었다. 범인의 차량에서는 사제 폭발물까지 발견되었다고 한다. 즉시 사살되지 않았다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 테러 사건으로 기록될 뻔했다.
지지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트럼프에 대한 총격 사건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인에 대한 극단적인 테러가 최근 몇 년 사이 아시아, 유럽, 미국, 남미 등 전 세계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일본 아베 전 총리가 전직 자위대원이 쏜 총에 맞아 죽었고, 같은 해 아르헨티나에서 전 대통령(현직 부통령)에 대한 총격 시도가 있었다. 그해 10월 미국에서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집에 칼을 든 괴한이 침입해 남편이 큰 부상을 당했다. 이듬해에는 일본에서 현직 기시다 총리에 대한 폭발물 테러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총선 때 이재명, 배현진 의원에게 흉기 공격이 있었다.
이밖에도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전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정치테러는 왜 늘어나고 있을까? 상대편을 거의 악마라고 믿게 된 이유는무엇일까?
오늘 Q파일의 질문들이다.
미드저니로 그린 삽화
의미있는 갈등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일은 늘 있어왔다.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이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이라고 말했다. 이익 집단들이 갈등하고 부딪히다 보니 잠재된 사회적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며, 그로 인해 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정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고 본 것이다.
또한 논란이 되는 이슈가 생기면 사람들이 평소에 몰랐던 문제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갈등이 정치 참여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갈등이 정치 참여와 대화를 이끌어내고 정책까지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잘 정리된 사실이 제공되어야 한다. 질 좋은 시멘트로 건물을 지어야 살기 좋은 튼튼한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예전에는 TV나 신문 같은 미디어가 공론장에 사실을 공급하는 역할을 꽤 열심히 했다.
받아보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다들 욕먹지 않기 위한 선은 지키고자 노력했고, 누군가 사실을 왜곡하더라도 다수가 경쟁하며 사실을 취재해서 보도하면 공론장에 풀린 썩은 물은 곧 정화됐다.
미디어가 암살 시도를 은폐한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합의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트럼프가 총을 맞은 직후 X를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에는 “미국의 주요 미디어가 트럼프 암살 시도를 은폐하려고 한다”는 음모론이 빠르게 확산됐다.
CNN이나 워싱턴포스트는 사건 직후 1보에서 <트럼프가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호위를 받으며 퇴장했다(Trump Escorted Away After Loud Noises)> 정도의 중립적인 헤드라인을 뽑았는데,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유명인들은 이 헤드라인을 캡처해 이것이 주류 미디어가 트럼프 암살시도를 축소하고 거짓말을 한다는 근거로 이용했다. 암살 시도가 확실한데 그냥 적당히 퇴장했다는 식으로, 트럼프에 대한 주목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축소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음모론의 뿌리에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에 관한 믿음이 있다.
근 몇년 사이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는 '딥 스테이트'라는 비밀스러운 엘리트 기득권 집단이 서민을 수탈하고 테크 기업과 미디어를 앞세워 미국을 지배하려한다는 음모론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미국 공영라디오방송 NPR이 2020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민의 39%가 딥 스테이트가 진짜라고 믿는다. 심지어 트럼프가 낙선한 2020년 대선이 조작됐다는 트럼프 말을 그대로 믿는 미국인의 비율도 무려 39%다.
'딥 스테이트'를 믿는 이들은 이번 총격 역시 서민의 영웅 트럼프를 박해하는 딥 스테이트의 기획이라 믿는다. 그리고 암살에 실패하자 딥 스테이트가 미디어를 움직여 뉴스를 축소했다고 이야기한다.
소셜 네트워크 알고리즘은 이런 자극적인 음모글을 좋아한다.
글에 반응이 몰리면 알고리즘은 그 글이 사실이든 말든 순식간에 퍼뜨린다. 그래야 사람들이 플랫폼에 더 오래 머물면서 이것저것 클릭하고 광고도 보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거짓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일론 머스크와 그 추종자들이 퍼뜨린 위의 헤드라인도 그렇게 순식간에 '주류 미디어의 거짓말'로 널리 퍼져나갔다.
한번 생각해 보자. CNN이나 워싱턴포스트는 왜 첫 헤드라인을 건조하게 뽑았을까?
신뢰받는 언론사들은 중요한 사건일수록 오보를 내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한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자들을 투입해 집중적인 팩트 체크를 한다. (그러지 않은 대표적인 예가 세월호 전원구조 오보다.)
그런 취재를 거쳐 범인의 존재와 범행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자 두 언론사는 제목을 즉시 정정했다. 하지만 더 정확한 사실 전달을 위한잠깐의 지연은 음모론의 근거로 둔갑해 버렸다.
이로써 '엘리트들이 만든 법이나 윤리까지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서민의 영웅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딥 스테이트'가 움직여 심지어 암살까지 시도했다는 자극적인 가짜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참고 : 위 과정을 논의하고 정리한 워싱턴 포스트 기사 : "트럼프 총격 사건에서 사실 확인을 위한 언론의 기다림은 어떻게 백래시를 불러왔는가?"
'팩트'는 어떻게 힘을 얻을까?
진실과 사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처음은 아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주류 미디어는 없는 일화까지 꾸며내서 대통령 찬양을 했다. 하지만 그때 사람들은 땡전뉴스만 보면서도 진실이 뭔지 알았다. 미디어가 엉망이어도 사람들은 스스로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며 균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개별적 인식이 통합되며 온전한상식(common sense)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80년대 한국에서 '군인들이 광주에서 죄없는 시민 수백명을 총을 쏴서 죽였다' 같은 팩트는 '북괴 간첩들이 침투해서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짓 정보와 경합해서 대부분의 커뮤니티에서 승리했다. 양적으로는 '북괴 간첩설'이 압도적으로 많이 유통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상식에서 어긋나는 정보가 점차 기각된 것이다.
일시적으로 상식이 주류나 다수의 입장을 과잉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같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여러 사람들이 보고 들은 바에 비춰 올바른 팩트가 퍼지며 점차 상식도 교정된다. 팩트는 자생력을 가진 생물과도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긍정 가설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각자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부분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 사람들의 마주침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예전에는 어쨌든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의 사회적 성격 때문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은 일터에서 어우러졌다. 불과 10~20년 전까지 공장이나 회사, 농촌에서는 적어도 그랬다.
하지만 지식 노동이나 플랫폼 산업이 경제의 뼈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타인과 마주칠 기회가 줄어들었다.
제조업 생산은 로봇이 대체하고 플랫폼 노동에서는 각자의 이동수단을 타고 일한다. 쿠팡 창고에서는 여럿이 일하지만 협력할 필요가 없다. 모니터로 하달되는 지시에 따라 각자의 일을 할 뿐이다. 심지어 요즘 빠르게 성장하는 AI 학습용 데이터 레이블링 업체의 노동자 수십만 명은 전 세계 각 대륙에서 자기 집 컴퓨터로 일한다.
생각의 차이는 왜 자꾸 커질까?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자연이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현대 도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롭다. 항상 무언가와 연결되어있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 타인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면 인간 특유의 ‘다름’이 부담스럽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생각, 나에 대한 부정을 피하고 싶어 한다.
구글, 메타 등 빅테크는 그런 본능을 연구하고 수익화한다. 빅테크가 만들어내는 수익모델의 일관된 방향은 (1) 항상 연결된 느낌을 주고 (2) 그 연결된 세계에서 타인의 이견이나 부정적인 느낌을 없애며 (3) 도파민을 즉시 자극하는 놀거리를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플랫폼에서 자기와 비슷한 것들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은 자신이 유튜브나 SNS에서 타인을 많이 접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해 보면 거울의 방 속에서 자기 모습의 반사일 뿐이다. 이견이나 부정 같은 타자의 특성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피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의견의 형성 과정이란, 어렴풋한 내 입장이 나선형으로 돌면서 타인을 참조하고 좀 더 풍요로워져서 돌아오는 과정이다. 요즘에는 나선으로 갔다가 오긴 하는데 건너편에 타인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것이 서 있는 셈이다.
이렇게 각자 거울의 방에 머물다 보면 자신의 편견이나 고집이 뱅뱅 돌면서 망상에 가까운 수준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올해 1월 부산에서 이재명 대표의 왼쪽 목 부위를 칼로 찌른 김모씨는 "종북 세력이 공천을 받고 의회를 장악한 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가 해괴한 망상이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극단적 유튜버들이 늘 발신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이 만든 거울의 방이 습격범 김모씨를 만든 것이다.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나?
이렇게 거울의 방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어떤 정치인의 팬덤이 된다. 얼마전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그 사람들이다.
제대로된 정치인이라면 이런 극단화에 경계심을 가지고 혐오 표현이나 근거없는 공격을 삼가야 한다. 국민이 돈과 관심을 모아주며 선출직 권력자들과 정당인들을 먹고살게 해주는 건, 그들이 사회를 통합하는 공적인 노동을 할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들 상당수는 그저 검사가 조금 더 큰 칼을 원하듯, 재벌 대기업이 문어발 확장을 하듯, 더 큰 힘과 자원을 차지하려는 동기로 나선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사회 통합이 활동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다. 승진이나 커리어 확장의 사다리 끝에서 정치인이 되기를 선택한 것뿐이다.
트럼프 역시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팬덤에게 거짓말을 유포하고 더 극단적인 행동을 부추겨왔다. 한국도 다를 바 없다. 국회의원이나 정당 대표들이 자기 편의 팬덤으로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다 보니 반칙을 일삼는 스포츠 선수처럼 상대를 물어뜯는다.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것 같다.
일자리 없는 여성과 빈곤한 남성을 이간질하고 노인과 젊은이를, 좌와 우를 싸우게 만들어 자기 표를 모으는 나쁜 정치인. 어그로를 끌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협박과 날조를 일삼는 유튜버들은 또 얼마나 늘어날지.
이미 전 세계에서 소수자를 차별하고 이민자를 내쫓자는 극우 정치인들이 의회와 정부를 접수하고 있다. 트럼프가 총격당한 후 주먹을 들고 "Fight!"라고 외치는 장면은 전 세계의 잠재적인 정치 테러리스트들에게 강렬한 심리적 자극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자극은 거울의 방에 갇힌 사람들에게 특히나 안 좋은 영향을 준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적의와 망상이 활활 불타도록, 거울의 방에 마른 장작을 던져주는 셈이다.
주요 국가의 전현직 정상이나 대선 후보들이 거의 빠짐없이 테러를 당하고 있는 이상, 우리나라의 다음 대선도 위험하다고 본다.
계속 나빠질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인들이 만든 지도와 문헌에는 미지의 땅에 사는 기괴한 모습의 생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자신들이 잘 모르는 땅에 사는 사람들을 미개하고 공포스럽고 적대적인 존재로 상상한 것이다.
비슷하게 요즘 사람들도 상대 쪽에 있는 사람들을 세상 상종 못할 존재라 믿고 척결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각자 올라있는 산봉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으니 누가 저쪽에 괴물이 산다고 헛소문을 퍼뜨려도 확인할 길이 없다.
놀랍게도 미국인 절반 이상이 10년 내에 미국에서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관련 기사) 하기야 '딥 스테이트' 같은 것을 믿는 이들 입장에서는 성전을 일으켜 악마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것들 다 남 걱정이면 좋겠지만 한국도 만만치 않다. 빨간쪽이나 파란쪽이나 자기들이 지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투표 부정을 이야기하지 않던가. 이러다가는 남북 분단에 이어 서울 분단 같은 것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치적 극단화의 문제도 그렇지만, 출생률 그래프나 OECD 자살률 순위처럼 이미 최악 혹은 갈수록 나빠지는 중대한 사회 현상을 보면 쉽게 무기력해진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이 나빠질 가능성은 항상 있었고, 그걸 늦추거나 되돌릴 수 있는 쓸만한 방법들도 여럿 통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 힘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사실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고, 차별당하는 약자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기록하며, 문제에 대해 거듭 발언해야 한다. 이탄희나 박용진, 장혜영처럼 드물게 나타나는 공적인 사명감과 실력을 가진 정치인을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을만한 사실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지고 극단적인 뉴스가 넘쳐나다 보니, 나 역시 마찬가지로 뭐가 중요한지 자주 놓치게 된다. 너무 정보가 많고 도파민 터지는 얘기들이 늘 밀려온다.
개중에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붙잡고 각인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글 서두에 던진 질문들과 관련해서 주목할 사건이나 변화가 일어나면 계속 따라가며 적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