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전문가에서 동화의 주인공으로
[ 프리미어리그 감독 열전 ] 세 번째 편의 주인공은 2015-16 시즌 레스터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동화 같은 스토리를 써낸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다. 이탈리아인 실용주의자 감독은 어떻게 유럽 축구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으며, 실패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가 레스터의 동화 같은 우승 스토리를 쓸 수 있었을까?
"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
레스터 시티
1951년생, 현재는 자신의 고향 클럽 AS로마에서 고문으로 있는 라니에리. 그가 2015년 레스터 시티의 감독직에 올랐을 때도 60대의 나이였을 정도로 트렌드에 뒤쳐진, 이제는 유럽무대에서는 실패한 감독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부임 당시 레스터의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대부분의 축구팬들 또한 라니에리가 얼마 못 가 경질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라니에리는 레스터 부임 전 어떤 커리어를 가진 감독이었고, 어떤 전술을 구사하였는지부터 알아보자.
*라니에리는 선수시절 수비수였다. 은퇴 이후 아마추어 리그팀들의 감독을 주로 맡았고, 88년 3부 리그 칼리아리의 감독직을 맡아 3년 만에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킨다. 이러한 성과를 눈여겨본 나폴리가 그를 감독으로 영입한다. 첫 시즌에는 리그 4위라는 괜찮은 성적을 내지만 다음 시즌 성적부진으로 사임한다.
*나폴리 시절 라니에리는 팀의 레전드 지안프랑코 졸라와 이후 이탈리아의 레전드가 되는 파비오 칸나바로를 발굴해내기도 한다.
[ 피오렌티나 / 창의적인 10번과 파괴적인 9번 ]
라니에리가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팀은 ACF 피오렌티나였다. 당시 피오렌티나는 치열했던 이탈리아 리그에서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며 리그 내 경쟁력을 인정받은 팀이었고, 그 중심엔 라니에리의 축구 철학이 있었다. 그 철학은 조직적인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 축구였다. 피오렌티나의 공격은 언뜻 보면 롱볼과 직선적 스루패스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속에는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특유의 느린 탬포 속에서 빠른 공격 전환과 창조적인 10번을 활용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 했다.
당시 피오렌티나에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 후이 코스타 ' 와 최고의 피니셔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가 있었고, 라니에리는 이 둘을 중심으로 공격시스템을 구성한다. 4-3-1-2 형태에서 10번 자리에 코스타를 위치시켰고, 팀 전술의 중심을 중앙 2선에 두었다. 상대 수비라인의 압박을 유도한 뒤, 공격의 중앙에 위치한 코스타는 양쪽 풀백들과 공격작업을 이어가며 최종적으로는 전방의 바티스투타에게 직선적인 패스를 넣어주며 공격작업을 마무리지었다. 바티스투타는 , 골가뭄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에서 96-97 시즌 리그 19골을 득점할 정도로 탁월한 골감각을 보여주었다.
*피오렌티나의 공격과정을 3가지로 분류해 본다면, 첫 번째로는 후이 코스타가 공을 받은 뒤 정교하면서도 빠른 패스로 최전방의 바티스투타에게 공을 전달한 뒤 바티스투타가 슈팅을 가져가는 패턴이다. 두 번째는 하프 스페이스 공략이다. 당시 피오렌티나에는 전문 윙어가 존재하지 않았고 공간 공략을 위해 양쪽 풀백이 전진했고 팀의 중심 후이 코스타가 풀백들과의 2대 1 패스를 통해 창출해 낸 공간으로 바티스투타가 뛰어가는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 후이 코스타가 공을 가지고 전진하고 바티스투타는 공을 받을 준비보다는 더미런 ( 상대 수비를 따라오게 만드는 가짜 움직임 )을 가져가며 수비를 끌고 가고, 이를 중앙미드필더들이 공략하는 방법이었다.
수비전술은 어땠을까? 공격과정에서 공을 빼앗겨서 상대의 역공이 진행될 때 피오렌티나는 4-4-2 전형으로 좁은 블록을 형성했다. 2선의 코스타의 약한 수비력으로 인해 양 측면 미드필더가 내려오며 두줄 수비를 완성했다. 수비 시에는 대인마크보다는 공간을 지키는 수비를 하며 패스 경로를 차단했다. 이로 인해 상대는 측면 위주의 공격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뒤로 공을 돌리면 전방압박에 나섰고 이때 앞의 코스타와 바티스투타는 전방으로 뛰며 일시적 맨투맨 압박을 가져갔고, 뒤이어 아래의 3선 미드필더들도 압박에 가서하며 중원에서의 볼탈취를 시도했다.
라니에리는 피오렌티나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스페인 명문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직을 맡았고, 2000년 9월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자신의 나폴리 시절 제자였던 지안프랑코 졸라를 중심으로 팀을 꾸리며 꾸준한 성적을 냈고 2002-03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도 따낸다. 하지만 2003년 첼시는 러시아 부호 ' 로만 아브라모비치 ' 에 인수되고, 로만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가혹한 이유로 라니에리를 경질한다.
*라니에리는 90년대부터 첼시에서까지 뛰어난 팀리빌딩 능력과 유망주 발굴능력을 보여주었다. 나폴리에서는 칸나바로와 졸라를, 피오렌티나에서는 톨도와 후이 코스타를 영입해 리그 정상급 선수로 만들었다.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서는 발렌시아를 유럽 최정상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으로 리빌딩했고, 첼시에서도 램파드, 조 콜, 마케렐레, 더프를 영입하며 팀의 기반을 쌓았다. 이러한 선수를 보는 눈은 레스터에서의 첫 시즌에도 빛을 발한다.
[ 레스터 시티 ]
라니에리의 레스터 시티 부임은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2013-14시즌 팀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끌고 14-15 시즌 극적인 리그 잔류를 만들어낸 나이젤 피어슨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5-16 시즌을 앞둔 태국에서의 프리시즌 투어에서 성매매/인종차별 논란이 터졌고 해당 사건에 가담한 선수들 중 피어슨 감독의 아들인 제임스 피어슨도 포함되어있었다. 레스터 시티의 구단주가 태국인이었기에 피어슨 감독은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당시 무직이던 라니에리가 선임된다.
*레스터 시티는 이적시장에서 로베르트 후트, 괴칸 인러, 은골로 캉테, 오카자키 신지, 크리스티안 푹스를 영입한다. 리그 우승경쟁을 위한 영입들은 아니었다.
2015-16 레스터 시티 전술
기본적인 대형은 라니에리가 90년대부터 즐겨쓰던 4-4-2 포메이션이었고, 전방에는 뒷공간 침투에 능한 제이미 바디와 많은 활동량을 가져가는 오카자키 신지를 배치했다. 주전 미드필더로 영입된 괴칸 인러의 부상으로 인해 은골로 캉테가 대니 드링크워터와 중원을 구성했고, 측면에는 올브라이튼과 마레즈가 배치되었다. 포백은 푹스-후트-모건-심슨이라는 피지컬과 높이를 갖춘 맴버들로 맞춰졌다.
[ 수비 ]
포메이션은 4-4-2였지만 시즌 초반 언더독의 위치에서 시작한 레스터였기에 수비 상황에서는 내려앉은 4-4-1-1의 포메이션이었고, 공간을 압축해서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수비 시 하프스페이스를 점유하려고 하기보다는 중앙지역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풀백들은 낮은 위치에 두며 빠르지 않은 두 센터백들의 약점을 최소화했고, 라인을 내리며 상대의 롱볼과 침투에 대비했다.
[ 공격 ]
2015-16 레스터의 공격을 요약하자면 역습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롱볼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레스터 시티의 전술은 단순한 4-4-2의 틀 안에서 완벽히 계산된 효율의 축구였다. 점유율은 낮았지만, 볼을 잡는 순간 즉시전환하며 역습을 실행했다. 캉테의 탈취로 시작해 드링크워터의 직선 패스, 마레즈의 컷인 혹은 바디의 침투로 마무리되는 구조였다. 공격의 초점은 점유가 아니라 위치 선택에 있었고, 대부분의 슈팅은 페널티 아크~스폿 사이의 고확률 지역에서 나왔다. 마레즈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오른쪽 하프스페이스를 공략했고, 알브라이튼은 균형을 잡았다.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푹스의 킥과 후트·모건의 제공권으로 득점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레스터는 xG 51.8에서 68골을 넣으며 리그 최고 효율을 기록했다. 빠른 전환, 간결한 결정, 정교한 공간 점유로 완성된 레스터의 공격은 기적이 아닌 확률을 통제한 전술적 수학이었다.
2015-16 레스터의 핵심
[ 리야드 마레즈 ]
위 그래프는 리야드 마레즈의 14–15시즌과 15–16시즌의 퍼포먼스를 비교한 자료로, 우승 시즌에서 그가 얼마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는지를 수치로 보여준다. 14–15시즌에는 경기당 비페널티 득점이 0.17, 박스 안 득점 0.09에 불과했으나, 2015–16시즌에는 각각 0.41로 4배 이상 상승했다. 슈팅 정확도도 38.1%에서 43.2%로 향상되며 마무리의 질이 개선되었고, 득점 전환율은 6.35%에서 16.22%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어시스트 역시 0.13> 0.38로 늘어나 팀의 공격 전환에서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드리블 성공률은(3.41> 3.56)로 유지되면서 효율이 향상되었고, 인터셉트·태클 수치가 약간 줄어든 것은 수비보다 공격 전환에 집중한 결과로 해석된다. 전반적으로 마레즈는 볼 터치와 슈팅 선택의 질을 끌어올려, 라니에리 체제의 빠른 역습 전술 속에서 결정력 중심의 효율적인 윙어로 진화한 시즌이었다.
[ 제이미 바디 ]
다음 그래프를 보자. 제이미 바디의 14–15시즌과 15–16시즌 성과를 비교한 자료로, 그가 어떻게 ‘챔피언 팀의 스트라이커’로 진화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14–15시즌 비페널티 득점은 경기당 0.20골이었으나, 15–16시즌에는 0.53골로 급상승하며 세 배 가까운 효율을 달성했다. 박스 안 득점(0.20 > 0.50)과 슈팅 시도(1.92 > 3.07) 모두 대폭 증가해, 공격의 중심이 그에게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슈팅 정확도는 50%에서 45%로 약간 낮아졌지만, 득점 전환율은 10.4%에서 17.2%로 상승, 더 높은 난이도의 찬스를 성공시켰다. 패스 정확도 역시 54.3%에서 65.4%로 개선되어 단순 피니셔가 아닌 연계 플레이의 완성도까지 높아졌다. 이는 라니에리의 역습 전술 속에서 바디가 단순 속도형 공격수를 넘어 ‘공간을 읽는 결정형 스트라이커’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즉, 15–16시즌의 바디는 빠른 전환과 직선적 침투를 극대화한 전술의 완성체이자, 효율적 득점의 상징이었다.
바디와 마레즈라는 기존의 자원을 성장시키고, 캉테라는 축구천재를 발굴하며 2016년 레스터시티의 기적같은 우승을 달성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하지만 동화의 뒷페이지는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2016-17 시즌 시즌 중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고, 이후 낭트,로마, 삼프도리아 등의 감독직을 맡았지만 길게 가지 못했고, 2025년 AS 로마에 소방수로 투입된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라니에리는 전술의 혁명가도 파워풀하고 화끈한 리더십을 보여준 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온화하고 선수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과 자신만의 확고한 전술 철학으로 유럽축구에서 40년동안 살아남았고 동화를 써내려갔다. 이탈리아식 전술적 냉철함과 영국식 인간미가 결합된 인물, 그의 철학은 축구는 숫자가 아니라 믿음과 조직의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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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 마르셀로 비엘사 '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