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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L 감독 열전 EP.2 ]
아르센 뱅거

' 하이버리는 내 영혼이다. ' 2006년의 아스날 전술사

by 피오의 덕후공방


프리미어리그 감독 열전, 두 번째 페이지 ' 아르센 뱅거 ' 편이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스날이라는 클럽을 지휘한 만큼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기에 이번 글에서는 하이버리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5-06 시즌의 아스날과 뱅거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아르센 뱅거 /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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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거가 1996년 아스날에 온 이후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그중 한 번은 리그에 전무후무한 무패우승이었다. 놀라웠던 2003-04 시즌 이후로 아스날은 큰 위기에 처한다. 일명 ' 애쉬버튼 그로브 프로젝트 ' 가 아스날의 발목을 붙잡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아스날의 회장 피터 힐우드는 기존의 38,000석에 불과했던 비좁고 오래된 하이버리 스타디움의 대체할 새 구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아스날은 런던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가진 클럽이었고, 첼시와 토트넘은 그저 그런 구단에 불과했다. 런던에서의 입지를 굳히고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모든 구단 수뇌부가 이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감독이었던 아르센 뱅거와 부회장 데이비드 데인은 신구장 건설을 반대했다. 특히 데인은 당시 아스날의 빈약한 재정상황과 런던의 높은 물가를 근거로 웸블리 임대를 고려해 볼 것을 요청했다. 데이비드 데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는 진행되었고 구단내 권력다툼과 불화로 2006-07 시즌을 마지막으로 데인은 아스날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한 구단의 강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는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2002-03 시즌 뱅거와 아스날은 구장건설을 위한 재원확보에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만 했고 2004년 2월이 되어서야 공사는 시작될 수 있었다. 그 시기 동안 아스날은 주축선수들을 판매하는 한편 유망주 영입과 육성에 열을 올렸다. 그럼에도 2006년 오픈한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2005-06 아스날 전술


아스날의 전성기를 열었던 뱅거볼 시스템은 주축선수들의 이탈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빠른 공수전환과 볼탈취 후 순간적으로 많은 공격숫자를 박스 안으로 투입시키는 1기 뱅거볼은 '패트릭 비에이라'라는 위대한 미드필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에이라는 유연하면서도 뛰어난 패싱 능력을 가진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였고 질베르투 실바와 함께 중원에서 상대의 공을 탈취해 오는 것에도 능했다. 압도적인 피지컬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무대에서도 이겨낼 선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팀의 주장, 비에이라는 이전부터 잦은 이적설을 즐기는 듯했다. 2002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에 근접했지만 아스날은 그를 붙잡았고 역사적인 무패우승을 함께한다. 하지만 유럽대항전 트로피에 대한 비에이라의 갈망은 계속되었고 2005-06 시즌을 앞두고 1,370만 파운드에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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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이라의 이탈은 포메이션을 변화를 가져왔다. 압도적인 기량의 선수를 잃은 아스날은 더 이상 4-4-2를 사용할 수 없었다. 중앙 미드필더 두 명만으로는 공간을 점유할 수도, 빌드업을 전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뱅거는 4-3-3을 채택한다. 이미 2004년부터 첼시의 무리뉴는 마케렐레를 중심축으로 한 3 미드필더 시스템의 우월성을 보여주었고 전방의 투톱은 올드스쿨처럼 여겨졌다.


피봇의 자리에 질베르투 실바, 그 위로 중앙에 파브레가스와 플라미니가 서며 빌드업 체계를 견고히 했다. 이 시즌에는 벨라루스 특급, 흘렙도 영입되며 팀의 창조성에 힘을 보탰다.


*주전 수비수 솔 캠벨의 시즌 중 이탈은 뼈아팠지만, 센데로스와 콜로 투레가 이를 잘 메우며 아스날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투레는 비야레알과의 준결승 1차전,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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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는 융베리와 피레스가 윙어의 포지션에 위치했고, 그 뒤를 로렌/에부에 - 애슐리 콜이 보좌했다. 양풀백 들은 높은 위치로 오버래핑하며 윙어들의 하프 스페이스를 공략을 도왔고, 이 과정에서 유망주였던 에부에가 주전 자원으로 도약한다. 우측 윙어 융베리는 더욱더 공격적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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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중반에는 애슐리 콜이 장기부상을 당하며 플라미니가 좌풀백 자리에서 뛰었다. 이 과정에서 로베르 피레스가 중앙 미드필더의 자리에, 레예스가 측면 넓은 공간으로 벌리며 윙어의 위치에서 뛰는 형태로 시즌 중 아스날은 변화한다. 앙리는 시즌 초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복귀 이후 원맨쇼를 보여주며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격에 방점을 찍어주었다.


*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는 상대가 쉽게 라인을 올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상대가 강한 압박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측면의 레예스는 뛰어난 테크닉으로 터치라인 부근이나 페널티 박스 안으로 꺾어 들어가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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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스날을 상대한 레알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는 전형적인 4-4-2 시스템을 가져왔고, 뱅거는 상대를 중원에서의 과부하를 통해 공을 탈취하고 공격을 전개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세 명의 미드필더들은 많은 활동량을 통해 상대를 압박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경기양상은 어땠는지 자료를 통해 알아보자.


*2005-06 시즌 아스날의 핵심은 18세의 어린 천재, 세스크 파브레가스였다. 중원에서 그는 경기를 조율하고 공격을 조립하는 과정을 떠맡았음에도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8강 유벤투스전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스날 vs 유벤투스


- 경기 득점 장면


당시 세계 최강이던 유벤투스를 상대로 아스날은 평균 연령 23세의 젊은 스쿼드를 꾸린다. 이는 노쇠한 상대의 미드필더 조합 에메르손과 비에이라를 겨냥한 것, 느리고 직선적이던 유벤투스는 아스날의 빠른 중원 압박과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템포 장악으로 많은 역습 장면을 만들어낸다.


측면에서는 흘렙과 레예스가 네드베드와 사네티를 계속해서 눌러주었고, 이러한 압박에 전방의 즐라탄과 트레제게는 고립된 채 공격도 마비된다. 위의 두 득점장면을 보면 아스날의 공격패턴을 알 수 있다. 중원에서의 빠른 탈취, 전방의 공격자원 ( 측면의 레예스 또는 앙리 ) 에게 공을 전달한 뒤 하프스페이스로 뛰어들어가는 파브레가스에게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중원에서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플라미니-센데로스-투레-에부에로 구성된 젊고 활동량 넘치는 수비진들은 라인을 끌어올리며 유벤투스를 강하게 밀어붙혔고, 그러면서도 상대에게 침투패스를 허락하지 않았다.


해당 경기에서 아스날이 14개의 슈팅과 7개의 유효슈팅을 가져갈 동안, 유벤투스는 5개의 슈팅과 단 한 개의 유효슈팅만을 가져가며 공격자체를 하지 못했다. 1골 1 도움을 기록한 세스크는 평점 9.5를 받는다.





아스날 vs FC 바르셀로나


-경기 주요 장면 [ 전반전 ]








2006 챔피언스리그 파이널, 아스날은 스페인의 강호 바르셀로나를 만난다. 4강에서 AC밀란을 잡고 올라온 바르셀로나는 어려운 상대였지만 경기 초반, 아스날에게 수차례의 공격찬스가 찾아온다. 에부에의 크로스를 앙리가 골문 코앞에서 아쉬운 마무리를 보여주었고, 좌측면에서 데쿠를 벗겨내며 찬 강한 슈팅도 발데스 키퍼에게 막히고 만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는 호나우지뉴라는 천재가 있었다.


전반 18분, 호나우지뉴는 감각적인 스루패스를 에투에게 밀어주었고, 골키퍼와의 1대 1 상황을 맞이한 에투가 튀어나온 옌스 레만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레만은 디렉트 퇴장을 당한다. 이로 인해 피레스가 교체아웃되고 알무니아가 투입된다.


*뱅거의 선택은 나이가 있어 에너지레벨이 줄어든 피레스보다 왕성한 활동량을 가져가는 융베리와 젊은 흘렙이 10:11의 상황에서 승부를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피레스의 생각은 달랐다.


레만의 퇴장에도 불구하고 선제골은 아스날의 것이었다. 에부에가 얻어낸 프리킥 찬스를 앙리가 캠벨에게 전달했고, 이를 바르셀로나의 골문으로 밀어 넣으며 1-0으로 앞서 가게 된다. 뱅거의 전략은 내려앉은 뒤 역습을 펼친다는 선택지뿐이었다.




-경기 주요 장면 [ 후반전 ]







후반전 뱅거는 6-2-1 형태로 완전히 내려앉는 선택을 했고, 최전방의 앙리와 융베리를 제외하면 압박을 가져가는 움직임도 줄어들었다. 전방압박을 최소화하고 수비라인을 좁히는 뱅거의 판단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바르셀로나의 공격은 무뎠고 아스날의 수비를 뚫어내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스날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융베리와 흘렙에게 노출된 바르셀로나의 높은 수비라인이었지만 둘 모두 아쉬운 슈팅으로 찬스를 날렸다.


레이카르트 감독은 이니에스타, 라르손, 벨레티를 차례로 투입하며 공격자원에 무게감을 더했고, 아스날은 파브레가스를 빼고 플라미니를 투입하며 수비간격을 유지하고자 했다.


* 파브레가스를 교체한 뱅거의 선택은 옳았을까? 파브레가스가 빠지면서 수비를 강화할 수 있었고 체력적으로 지쳐있던 중원에 에너지를 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아있었다면? 어쩌면 아스날은 바르셀로나에게 역공의 위협을 주며 바르셀로나가 라인을 높이지 못하게 할뿐더러 볼 탈출 루트를 남겨두어 팀의 밸런스를 유지시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스날의 끈질긴 저항은 거기까지였다. 교체투입된 라르손을 패스를 받은 에투가 75분 동점골을 터뜨렸고, 이후 79분 다시 한번 라르손의 패스가 침투해 들어가는 벨레티에게 전달되며 역전에 성공한다. 뱅거는 흘렙을 빼고 레예스를 투입하지만 경기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구단 창단 첫 빅이어를 들어 올릴 기회를 놓친 아스날의 이후 상황은 좋지 못했다. 먼저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의 프리미어리그의 위상은 너무나 달라져있었다. TV 중계권료 수익이 극대화되고 해외자본들이 밀려들어오며 아스날은 더 이상 리그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서있을 수 없었다. 에미레이츠의 총 건설비용은 4억 3천만 파운드. 2008년 찾아온 리먼브라더스 사태와 세계대공황은 아스날의 재정난에 치명타를 주었다. 아스날의 섣부른 구장 건설은 독이 된 것이다.


은행들은 부채를 떠 앉은 아스날에 독촉을 해왔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뱅거는 꾸준히 팀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시키며 구단의 연수익을 유지했고, 은행들도 뱅거의 감독직 유지를 담보로 아스날의 부채상환을 미루어주었다. 그렇게 아스날은 절망스러운 2000년대 중후반과 2010년대 초반을 보낸다. 이후 아스날과 뱅거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한번 다뤄보겠다.





[출처/참고자료]

coaches' voice / 유튜브채널 _ 파브레가스의 마스터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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