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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포국수 Jul 25. 2024

#7 (관점) - IMF

우리나라 초유의 경제위기

IMF – 우리나라 초유의 경제위기


1997년 12월 우리나라는 외환보유액 부족 사태에 따라, IMF(국제통화기금)의 긴급자금을 수혈받는 금융위기에 직면했다. 기업이 자금부족에 따라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것처럼, 국가 전체가 부도 직전의 상태에 빠졌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거시경제 지표 개선, 기업들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등을 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2008년, 미국 주택금융발(서브프라임 모기지) 글로벌 금융위기에 또 직면했다. 이외에도 2001년 초 인터넷/벤처 버블, 2002년 카드 대란 등의 경제위기가 도래해 기업활동이 위축되던 때가 있었다.


IMF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두 번이, 내가 직장생활 중에 경험했던 가장 혹독했던 경제위기로 기억된다.




1997년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1997년 말 우리나라는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이 체제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IMF를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급여통장의 입금액, 금리, 물가, 환율, 주가, 기업의 실적전망, 실업률 등 모든 것이 비관적이었다. 이 위기의 터널을 언제 벗어날지 예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시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장롱 안의 금붙이를 모으자는 범국민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부족하니, 온 국민이 외환에 준하는 금을 모아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내가 근무하던 삼성물산, 농협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매스컴의 주목과 전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TV 생중계 등 큰 운동으로 발전했다. 나도 아이 돌 반지, 회사 근속메달 등을 행사에 제출하고 현금을 받았다.


한 번은 삼성본관 사무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거인국의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삼성화재 남자 배구단 소속 선수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대회에서 수상했던 금메달들이 있었다. 금 모으기 운동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국심을 끌어내는데, 큰 촉매 역할을 했다.


우리 부서의 명칭이 ‘경영관리팀’에서 ‘구조개혁팀’으로 바뀌었다. 그룹의 ‘비서실’도 이때부터 ‘구조조정본부’로 바뀌었다. 우리나라가 IMF체제가 되었다면 그룹은 구조개혁, 구조조정 체제로 바뀐 것이다. 경쟁력 없는 한계사업의 정리, 인력의 구조조정(효율화)이 불가피했다.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비용절감 운동, 급여 삭감, 복리후생 축소, 무수익자산 매각 등 진짜 몸부림을 쳤다. 수익을 늘릴 수 없다면, 원가를 줄여서 이익을 확충하려는 긴축경영에 돌입했다.


나는 회사의 구조조정 계획과 실행방법을 만들기 위한 T/F에 뽑혀, 6개월간 별도의 사무실에서 작업했다. 간부 5명이었는데, 나는 T/F의 막내였다. T/F는 승인받은 개별 구조조정 계획을 관련 부서에 전파/교육시켰고, 그 진행 과정도 점검했다. 우리의 활동을 지켜보던 회사 내 사람들도, 우리 일의 엄중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의 결과물이 생산적인 게 아니라 감축, 효율 등 고통스러운 것뿐이었다. 초유의 경영 위기상황에 직면한 만큼, 우리의 발상은 과감해야 했으며 엄격한 원칙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도 사실은 두려웠다. 구조조정 대상의 사람, 사업 등과 연계해서 당시 나는 악몽에 많이 시달렸다.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T/F 기간 동안 회사 사람들과는 단절된 생활을 했다. T/F 활동이 끝나고, 현업에 복귀해서도 내가 속했던 지원조직 전체의 구조조정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룹과 각사에서 구조개혁, 구조조정이라는 부서 명칭이 사라지는 데 적어도 10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우리나라 대기업 중 일부는 무너지거나, 외국자본에 헐값에 매각되었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었다. 당시 제일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자체 제작했던 눈물의 비디오는, 보는 사람 모두를 슬프게 만들었다. 기업들은 부가가치가 떨어지는 기능조직들을, 과감히 독립 사내기업(분사)으로 전환했다. 급여지급/복리후생 전담의 인사기능, 차량기사 조직, 백화점의 안내조직 등이 해당된다.


선택과 집중, 글로벌 스탠더드, 자산매각, 분사라는 단어들을 지겹도록 말하고 들어야 했다. 이런 말들이 수북한 보고서를 만들어야만, 커뮤니케이션이 되던 시절을 한동안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동남아 다른 나라들에 비해, IMF 체제를 빨리 벗어났다. 인터넷과 벤처 붐으로 봄이 오나 했더니,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인터넷 버블 붕괴로, 경기의 불확실성은 지속되었다. 과거에도 이런 경기변동이 있었지만, 점점 짧은 사이클로 반복되었다.


IMF는 우리에게, 역대급의 경종을 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중장년층의 마음속에는, 가슴 아팠던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IMF 경제 위기가 왔던 그 해, 우리 아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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