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유학생·독립운동의 흔적 28독립운동

우리나라 흔적

by 구포국수

도쿄 유학생·독립운동의 흔적 28독립운동


도쿄의 2·8 독립선언은 “제국의 심장부에서 터진 한국 유학생들의 3·1운동 예고편”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워. 1910년대에 일본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그 상당수가 도쿄(와세다·도쿄제대·메이지·리쓰메이칸 등)에 모여 있었어. 이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 조선기독교청년회(도쿄 한국 YMCA) 등을 만들고 강연·토론·자치 활동을 하며, 민족의식과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교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며 분노가 폭발했고, 유학생들 사이에서 “지금이야말로 행동할 때”라는 공감대가 형성. 이 분위기 속에서 도쿄 유학생 독립운동의 결정판이 바로 2·8 독립선언. 1919년 1월, 유학생들은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도쿄 한국 YMCA)에서 웅변회와 토론회를 열며 구체적인 행동을 논의. 이 과정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Korean Young People’s Independence Organization)’이라는 비밀조직이 결성.


실질적인 준비와 실행을 맡은 이들이 바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인. 그리고 소설 무정의 작가로 유명한 이광수도 선언서 작성과 지도부에 참여한 인물 중 한명.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당이 도쿄 유학생들과 연결되면서, 이광수에게 선언문 작성이 공식 의뢰됨. 이광수는 도쿄 와세다대 근처 소바집 2층에 틀어박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한문/국문으로 작성하고, 이후 일본어·영어로 번역까지. 학생들은 이 문서를 인쇄·등사·타자 등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해 대량 복제.


1919년 2월 8일 아침, 도쿄에는 30년 만의 큰 눈이 내렸다고 전해져. 그날 아침 학생들은 먼저 준비한 서류들을 우편으로 발송. 발송 대상은: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 일본 귀족원·중의원 의원과 각료들, 조선총독 및 일본 정부 요인, 일본·해외 언론사들. 동봉한 문서는: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즉, “우리만 알겠다”가 아니라 국제 여론전까지 노린 매우 정치적인 행동.


오후 2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현재의 도쿄 한국 YMCA의 전신) 강당에 약 400~600명의 조선인 유학생이 모임. 회의가 진행되던 중, 대표단이 앞으로 나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인근 니시칸다 경찰서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들이닥쳐 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대표단과 주요 학생들을 체포. 대표 11인 중 대부분이 징역형을 선고받음. 대표 중 한 명인 송계백과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은, 선언문과 소식을 국내로 몰래 들여와 서울의 지식인·종교 지도자들과 공유. 선언문의 문구와 정신은 곧 3·1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됨. 실제로 2·8 선언문이 3·1 선언서의 초안에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가 여러 차례 제기.


1919년 2월 12일, 체포되지 않은 학생 100여 명이 도쿄 히비야 공원에 다시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독립선언서를 재차 발표하며 만세시위. 이때도 13명이 체포. 2월 19일에도 또 한 번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포위한 일본 경찰에 의해 무산. 이처럼 도쿄는 1919년 초 잠시지만, 조선 청년들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직접 만세를 외치던 도시. 재일본한국YMCA(東京韓国YMCA). 주소: 2-5-5 Kanda Sarugaku-cho, Chiyoda-ku, Tokyo 101-0064. 1919년 2·8 독립선언이 바로 이 회관 강당에서 발표. 현 회관 입구 옆에는 높은 흰색 석비가 서 있는데, “1919년 2월 8일 한국독립선언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어. 도쿄 중심부 빌딩숲 사이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흔적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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