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죽지 않았던 희망

by 권창현


슬픔은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건 곁에 머무는 것이고, 때로는 조용히 마음에 눌러앉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례가 끝나면 슬픔도 끝나는 줄 안다. 하지만 진짜 슬픔은 그 후에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온 밤, 아무도 없는 방 안, 예배 시간 중 갑자기 울컥할 때 — 그럴 때 슬픔은 나를 다시 붙잡는다.


하지만 그 무거운 마음 한가운데, 조용히 살아남아 있던 것이 있다.

희망이었다.


크게 울리지 않았다. 빛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리에 있었다. 잿더미 속 작은 불씨처럼. 젖은 장작 아래 숨어 있는 미약한 불꽃처럼.


희망이 있었다고 해서 내 슬픔이 끝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기억하며, 나는 매일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죽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던 거야.”


그는 내게 고마워했고, 자신이 버텨낸 시간이 나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적었다.


“이제는 고통을 멈추고 싶어.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그건 삶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다. 회복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 고백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살아 있고, 희망하고 있다. 그가 기다리던 그 나라를 향해.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면, 아마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칠지도 모른다.


“이걸 나 혼자 겪게 하다니, 진짜 너무했어.”


그리고 우리는 웃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쉴 것이다. 그곳엔 더 이상 조현병도, 우울도, 마지막 전화도 없을 테니까.




묵상 |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

희망은 어떤 날엔 거대한 선언처럼 보이지만, 어떤 날엔 그저 간신히 붙든 속삭임일 뿐이다. 그래도 그 속삭임은 살아 있다. 숨 쉬고 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울고, 기다리고, 마침내 부르셨다. 그 부활의 순간 속에서, 사람들은 함께 묶인 천을 풀어주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한복음 11:44)


예수님은 그 기적에 사람들을 참여시키셨다. 슬픔을 풀어내는 일, 회복을 함께 돕는 일.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내 친구가 붙들었던 희망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무덤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다.


희망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면, 오늘 하루는 충분하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