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3살쯤 되었던 어느날, 동아리 K 오빠가 이야기좀 하고 싶다며 명동 어느 까페로 날 불렀다.
(그때의 나는 뭔가 대단히 세상을 깨달은척 하고 있었고, 지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세상을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어른놀이가 재미있는 애송이였다^^.)
명동 2층 coin이라는 까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자마자...이 오빠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 너무 힘들어. 너도 들었지 선정이가 희태랑 사귄다는 소식...내가 그렇게 매달렸는데... 수녀님 될꺼라 그랬었잖아. 그래서 안된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희태라니. 내가 그 쪼그만하고 못생긴 놈보다 못한게 뭐야..흑흑...."
K 오빠는 꽤 오랜시간 선정이 언니를 좋아했고 여러번 고백했지만 선정이 언니는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곧 수녀원에 들어갈꺼라고 오빠의 고백을 정중히 거절했다.
성당에서 만난 그들이기에 수녀원에 들어가겠다는 선정이 언니의 대답을 K오빠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오빠는 곧 수녀원에 들어갈 선정이 언니에게 더 정성을 다하고 마치 수호천사처럼 언니를 보호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선정이 언니와 K오빠의 동아리 후배인 희태 오빠가 교제를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간간히 학교에서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도 보였고 연못가에 가만히 희태 오빠의 어깨에 기대어 앉은 선정이 언니는 누가 봐도 희태오빠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K오빠는 죽을 결심도 여러번 했지만 용기가 없다며 나를 불러낸 것이었다.
커다란 20대 남자가 커피숍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엉엉 우는 것은 슬픔보다 개그에 가까웠지만, 너무 진지한 K오빠의 이야기에 나도 빠져들고 말았다.
"바보가 되어버렸으면 좋겠어. 길가다가 큰 트럭같은 것에 부딪혀서 기억이란게 모두 지워져버리면 좋겠어. 평생 그렇게 바보로 살아도 좋으니 선정이를 잊을수만 있으면 좋겠어..."
한참을 K오빠는 방황을 했고 3년이 지난 후에야 다른 여자를 만나야 겠다는 결심을 해낼수 있었다. 오빠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와 몇년 후 결혼에도 성공했다.
이 지고지순하고 순수했던 오빠는 지금 한 대학의 교수가 되어 매정한 학점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니 삶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집에서 독일에 관한 글을 보다보니 갑자기 여행이 너무 간절해졌다.
그래..요즘 나 너무 지쳐있다. 어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하루종일 한끼도 먹지 않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아니 떠나지 않고는 내가 무너져버릴것 같아서 '여행자의 독서'라는 책을 들고 좋아하는 까페로 향했다.
아직 영글지 않은 단풍나무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낙엽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겠지. 가을은 사람의 감정을 너무 요동치게 한다.
최근 이사와 아이들의 전학문제 때문에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생각은 그만하고 그냥 어찌움직여보자고 하지만, 나중일은 나중에 닥치면 고민하고 해결하는 남편같은 사람도 있지만, 여러가지 상황들을 미리 고민하고 대비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누가 옳다고 할 수 없다. 그저 그 사람이 그런것일뿐
어서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결론은 나겠지. 사실 내 인생의 결정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거기에 내 몫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흐름에 내가 살포시 올라간 것일 뿐인 날 들이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뭐든 결정된 상태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
엉엉 울던 K오빠가 생각난다. 오빠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렇게 울며 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오빠는 참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아 나자신을 그렇게 온전히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하겠다고.
나 그때 오빠가 그랬던것처럼 요즘 울고 싶은 날들이라고, 그래도 시간에 치유되고 멋지게 살고 있는 오빠를 생각하면 삶에 희망을 갖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