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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May 05. 2023

어린이날, '감정'이 남는다

  어린이날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몇 살 때 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어린이날 선물로 가죽으로 된 시계를 사주셨다. 까만색의 윤기가 있는 아주 보드라운 가죽시계였다.


  오후의 어느 시간 아빠는 TV를 틀어놓고 낮잠을 자고 계셨고 엄마는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었다

남동생은 집 앞 놀이터에 갔는지 집에 있지 않았다.

코를 고는 아빠와 내용을 알 수 없는 뉴스, 그리고 오후의 어스름이 내려오는 거실에서 시계를 보며 혼자 생각했었다. '심심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건지 거실에 혼자 앉아 시계를 바라보는데 그렇게 외로울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어린이날은 '파티'였다. 다 같이 깔깔 웃고 게임을 하고 맛있는 걸 먹고 가족끼리 엉켜서 뒹굴거리는... 그날 거실에 시계를 들고 있는데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남는다.


  아마 내가 원했던 선물이었을 것이다. 아빠 엄마는 백화점에 가서 맏딸에게 줄 시계를 정성껏 고르셨을 것이고 선물을 여는 순간 난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겠지. 그런데 왜 나에게 어린이날은 오후의 쓸쓸함으로 남아있을까.


  엄마 아빠는 자상하고 가족애가 많은 분들이었지만 세련되지는 못했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어린이'시절에 쇠꼴을 벤 기억이 전부인 분들이 어린이날이라고 무언가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선물을 하고 그리고 장을 보고, 미뤄둔 낮잠을 자고 그게 엄마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른이 되니 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김영하 작가는 아이들과 여행을 다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이들이 기억을 하지는 못할 수 있어요. 하지만 감정이 남아요"라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팩트로 남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사실에 감정이 버물어져 기억이 된다.

  어린이날에 부모가 아이들과 어떻게 보낼지는 아이들에게 '어떤 감정'을 남겨줄 수 있는가로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다. 줄 서고 차 막히고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내가 어린이날 놀이공원이나 대형 쇼핑몰에 간다면 결과는 뻔하다. 짜증을 내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참고 있겠지만, 짜증은 고약한 냄새와 같은 것이라 꽁꽁 싸매도 밖으로 슬며시 퍼져 나올테니, 가족들은 나의 눈치를 보며 하루를 보내겠지.

  딸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날에 엄마랑 놀이공원에 갔는데 엄마가 계속 한숨을 쉬었다. 무서워서 최대한 즐거운 척하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이번 어린이날 계획은 이렇게 세웠다.

'내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 선물뿐이 아니라 함께 보내는 시간과 편안한 감정 이어야 한다.'

마침 강한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아이들과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이야기를 했다.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좋은 아이템이 있어야 하겠지.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예전부터 이야기했었던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가족이 함께 하는 게임기'를 알아보다 큰마음을 먹고 닌텐도스위치를 구매해서 어린이날 선물로 다 함께 개봉식을 가졌다.


"얏호!" "우와!" "대박~!"

세명의 환호가 들렸다. 첫 번째는 큰아이의 환호, 두 번째는 작은아이의 놀람, 세 번째는 남편의 단전에서 올라오는 기쁨이었다. ㅎㅎㅎ 모두들 좋아하니 대성공.



  아침에 간단히 누룽지를 먹고 다 함께 게임을 한판씩 했다. 요즘의 슈퍼마리오 게임은 3D로 펼쳐져 마리오가 점프를 할 때마다 온 가족의 어깨가 우리도 모르게 들썩거린다. 자기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집중하고 있는 둘째를 보며 셋이서 사진을 찍고 킥킥거리기도 했다.


사실상 마리오로 빙의된 첫째


  게임을 하다 지겨워질 때쯤 첫째와 둘째가 캐치티니핑 놀이를 시작했다. "자! 하츄핑 우리 학교 놀이 할까?" "그래 캐치티니핑!" 안방에 개어놓지 않아 아무렇게나 깔린 이불 위에서 아이들은 점프도 하고 뒹굴거리며 한참을 캐치티니핑 놀이를 했다. 개연성이 전혀 없는, 도무지 주제를 알 수 없는 놀이를 아이들은 뭐가 웃기는지 깔깔 거리며 한참을 계속했다.


이틈을 이용해 남편과 나는 커피를 마셨다.

음, 에티오피아 캡슐은 완벽에 가깝다.


  점심으로 치킨을 시킬까 하다가,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 배달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집에 숙성해 둔 연어회를 먹기로 했다. 첫째는 연어를 초장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하고 둘째는 간장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한다.


  오후에 라즈베리 쿠키도 함께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해두었다. 며칠 전부터 라즈베리 쿠키가 먹고 싶었던 엄마의 사심이 가득한 놀이이다.


오늘, 어린이날 아이들에게 어떤 감정이 남을까.

나는 다 함께 뒹굴거리며 깔깔대어서 즐겁고 행복한데 너희들에게 어떤 감정으로 오늘이 남을까.

나 또한 내 경험 안에서 육아를 하는 육아 미생이라 잘 모르겠다.

다만, 나의 행복한 감정이 너희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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