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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Mar 27. 2023

30시간의 단식


지난주 월요일에 제일평화시장에 다녀왔다.

"봄에는 제평이지~ 반팔티도 사고 모자도 사고~"

웬일인지 차도 밀리지 않고 신나게 동대문에 도착.


아... 도착하자마자 들른 제일평화시장 1층에서 자유로를 휩쓸 수 있을 것 같은 핑크색 부츠컷 바지를 세일하는 것이 아닌가!

스키니는 저리 가라!

부츠컷과 와이드팬츠가 올봄을 강타할 터이니!


판매하는 언니에게 "언니~~ 이 핑크색 부츠컷 바지 얼마예요~~"라고 물어보니

"원래 삼오(35)인 테 이팔(28)만 줘요~ 진짜 도매가로 주는 거야~"라고 답이 돌아온다.

아싸! 28000원이라니!!! 그런데 사이즈가 나에게 맞으려나??


"언니~ 그런데 이거 사이즈 있어요? 저한테 작을까 봐요~"라는 나의 물음에 판매원 언니는

"언니 66반이죠? 그럼 맞을 거야. 내가 77 언니들한테는 작다고 안 팔았는데 66반이면 따악~~ 맞을 거야."라고 했다.

.

.

.

66반... 66반... 살면서 처음 들어본 이야기' 66반처럼 보인다'는 이야기. 사실상 77.

슬며시 거울을 보니 뭔가 몸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음.. 66반의 모습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며칠을 고민했는데 그러고 보니 최근에 옷들이 다 작아져서 맨날 고무줄 바지를 입기도 했고, 모자를 써도 태가 안나는 느낌이었다. (모자를 썼을 때 이쁘려면 생긴 건 고사하고, 모자 아래에 살짝 비치는 날렵한 턱선이 필수다.)


적게 먹고 운동 많이 하면 살이 빠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말은,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비겁하지만,

적게 노력하고 살을 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다가

'일주일 단식을 하면 5kg'이 빠진다는 글을 한 인터넷 카페에서 발견했다.

이 카페의 회원들은 대부분 일주일 동안 물만 먹는 다이어트를 했는데 4~6kg 감량이 되었고, 디톡스 효과가 있어서 몸이 가벼워지기까지 한다니, 일석이조 아닌가!


일주일을 쫄쫄 굶어서 살을 빼겠다고 하면 남편이 비웃겠지... 하하

그래서 고민 끝에 '디톡스'를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 있잖아. 나 요즘 몸이 무겁고 머리가 좀 안 깨는 기분이거든? 그래서 디톡스를 해볼까 해."

"어떻게 하는 건데?"

"일주일 동안 물만 마시며 단식을 하는 건데 그러면 몸의 독소가 빠져나가서 디톡스 효과가 있다네? ( 운동 안 해도 살이 빠진다네?)"

"야... 이 나이에 그러다 쓰러져."

"한 번만 해볼래. 독소제거에( 살덩이 제거에) 그렇게 효과가 좋대."


마지못해 남편은 허락을 했고 일요일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 주고 혼자서 책을 보며 보리차를 마시는 우아함이라니!

이미 상상 속의 나는 H라인의 스커트를 입고 봄바람에 날씬한 라인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미역국을 끓였다. 내일부터 며칠 동안 아이들과 남편이 먹어야 하니 넉넉하게.

나트륨이 혓바닥을 자극할 수 있으니 미역국을 끓이며 간도 보지 않았다.

미역국을 먹어본 아이들과 남편은 엄지 척!

후훗 전업주부의 짬이란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


남편과 아이들에게 저녁식사로 불고기와 미역국을 차려주고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며 1박 2일을 보았다.

야구모자 아래 유선호의 턱선이 돋보인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다이어트야. 성공하고 말겠어..'더 힘차게 복근을 조이며 스트레칭을 해보았다.

그리고 배가 고플 수 있으니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아침인가....'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웬만해선 새벽에 깨지 않는데 이상해서 다시 잠에 들었다...

잠시 후 또 잠에서 깼다.

이번엔 새벽 3시 30분.

그렇다.

난 배가 고파 어제 새벽에 계속해서 잠에서 깼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과 남편의 식사를 차려주고 환기를 하며 스트레칭을 했다.

몇 번의 고비를 잘 넘긴 것 같다. 빈속이 된 지 24시간이 되었는데 이제 배가 고프지 않고 오히려 평온하달까?

뭔가 환상 속에 있는 기분, 몽환적인 이 느낌.... 엥??


배가 고파서 정신을 잃었는지, 먹은 게 없어서 기운이 빠졌는지

난 큰아이가 하교할 때까지 몇 번을 조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멍한 상태를 반복하다가 아이 하교 시간이 돼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큰아이가 간식으로 모나카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마켓컬리에서 주문한 일본전통 모나카 두 개와 우유를 아이의 간식으로 차려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쿠루루루룽!!!!!"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혼자 있을 때는 식욕이 없었는데, 바삭 쫀득한 모나카 씹는 소리를 듣자니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나를 가만히 보면 초3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 뭣좀 먹어. 그러다 쓰러져"

.

.

.

30분 뒤 나는 남편에게

"나 그냥 밥 먹을래 , 독소고 나발이고(다이어트고 나발이고) 배고파 쓰러지겠어"라고 문자를 보냈다.

남편은 생각 잘했다면서 박수를 쳐주었고

30시간 만의 음식을 무엇을 먹을까 깊이 고민하다가, 종이에 정성스레 쌓여진 모나카가 생각났다.


에스프레소 기계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리고

모나카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그 환희란!


30시간 만에 온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랄까.

당분이 신나게 심장에서 발끝까지 미끄러지는 그 미친듯한 속도감.

모나카 하나도 정성스레 최선을 다해 먹고 싶은 마음에, 음악도 다 끄고 고요히 식탁에 앉아

'바스락, 쫀득, 아삭' 소리를 느끼며 모나카 하나를 맘껏 음미하며 먹었다.


66반이면 어떻고 77이면 어떤가.

모나카가 이렇게 아삭거리고 쫀득한데.

혈색이 돌아온 나를 보고 비로소 우리 가족이 안심하는 것을 보고 다시는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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