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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Apr 01. 2023

최상위 파동, 그 이후

그 어려운 것을 당신이 해내고 있습니다.

  큰아이 1학기 상담날이었다.

  담임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수학'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기소개에 썼다고 전해주셨다.

  "주주가 제일 힘든 게 수학이래요. 그런데 이 녀석... 곧잘하거든요? 반에서 수학 잘하는 아이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요. 그런데 수학이 힘들다고 하는 게...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가 있다.

우리 가족끼리는 '최상위파동'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


  아이가 이런저런 문제집을 곧잘 풀길래 최상위수학이라는 어려운 문제집을 시켜보았다.

  몇 단원을 풀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수학문제집만 꺼내면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럴 것이 초등 2학년의 문제집인데, 내가 봐도 어려워도 너무 어려운 것 같았다.

  방정식 같은 것을 배워야 접근할 수 있는 문제를, 구구단을 배우고 있다는 9살이 풀자니 막막하긴 했을 터이다.


  너무 어려운 걸 시켰나... 고민하던 중 인터넷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아보니, 최상위 수학으로 1~2년 선행을 한다는 아이들도 꽤 많았다.

  여러 번 반복해 보면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아이에게 최상위 수학을 계속 풀도록 했고,

  주주는 매일 울고불고 수학이 싫다며, 자기는 수학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수포자가 되기에 9살은 너무 이르다.

  재미없는 공부를 하는 것이 몇 년이나 지속될 수 있을까.

또, 원하는 공부를 할 때의 '짜릿함과 통쾌함'을.

어려운 문제를 시험에서 만났을 때, 더 많이 준비하지 않았음을 반성하는 '후회'를

우리가 아이에게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준비하고 많이 풀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시험 때 결코 패배하지 않기를, 성공만 하기를 나는 아이에게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을 잡아 '최상위수학'을 아이와 함께 재활용통에 넣고 다시는 풀리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퍼포먼스를 행했다.

  이 사건이 우리 집의 '최상위파동'이다.

  그 이후 문제집을 고를 땐 항상 아이와 서점에 함께 해 아이가 스스로 문제집을 고르게 했다.

  물론 난이도도 함께 고민하고, 책의 폰트나 가독성, 때론 문제집의 일러스트에 대해서도 열띤 토론을 거치며 문제집을 고른다.

  아직도 서점에 가면 아이는 '최상위수학'을 펴낸 출판사의 모든 책을 거부하고 있다. ㅎㅎ




  어제는 아이와 선생님과의 상담이야기를 하며

  "주주야, 선생님께서 주주가 학교생활 정말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던걸?

   엄마 정말 자랑스럽고 주주에게 고마웠어. 그런데 선생님께서 수학에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셨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네. 하지만 수학은 너무 어려워요."

"응. 그렇지만 잘하고 있다니깐. 그러니깐 자신감을 가져."

"잘하고 있다니요. 너무 어려운데. 그냥 하는 거예요. 재미없지만."

.

.

.

  뭔가 쳇바퀴를 도는 듯한 대화를 아이와 나누다가 아차! 싶었다.

  아이는 아직 수학이 어렵다.

  아니 처음부터 수학이 어려웠다.

  다만 수학이 쉬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데 노력하는 것이었다.

  다시 아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아! 맞다. 수학은 쉽지 않아. 자신감을 가지기엔 절대 쉽지 않아.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야...그 어려운 것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는 거야.

 그 어려운걸 꾸준히 해내고 있는 우리 딸, 정말 자랑스럽다."


  그제야 아이는 안심한다는 듯이 살짝 웃음을 보였다.

  또 한 번 느낀다.

  마냥 칭찬하는 것이 절대 답이 아님을. 아이들도 속 빈 칭찬에는 감화되지 않는 것을.


  속 빈 칭찬, 속 빈 호응에 나도 오히려 얼마나 상처받았던가.

 뜬금없이 돌아오는, '너 진짜 멋지다. 대단한 것 같아.' 이런 말은 오히려 나에게 상처가 되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멋지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을 뿐 내가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견디다'라는 단어가 오히려 정확할 것이다.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날의 나의 모습은.


  문득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 그 어려운걸 내가 해내고 있네. 기특하다. 잘 견뎌내는 모습이'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슬며시 위로받으며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웃음이 나오며... 이렇게 아이를 통해 오늘도 나는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는 참 신비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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