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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May 03. 2023

'인척'해 봤자 다 티 난다

그런 날이 있다.

괜스레 엉덩이가 들썩이고 어디에 다녀오고 싶은 날

집에서 제일평화시장까지는 1시간, 오전이면 노상주차장에 늘 자리가 있다. 아이들 등교를 시키고 재빨리 가방을 챙겨 동대문으로 향했다.




  지금은 옛날 같지 않다 해도 여전히 상인들에겐 '제일평화시장'만의 자부심이 있다.

일부 가게들은 중국에서 옷을 떼어와 팔기도 하고 다른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와 라벨을 붙여 판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디자이너가 직접 옷을 만들어 가게만의 라벨을 붙여 파는 곳에서는 '명품'을 만들어내는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곳의 옷은 다르다. 개성 있는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손끝에 닿는 소재의 적절함, 박음질이나 마무리에서 정성 들여 만든 퀄리티 좋은 옷임을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제일평화시장에 종종 가다 보니 이제는 눈에 띄는 가게들이 생겼다. 옷의 퀄리티와 사장님의 친절함은반비례하는 것인지 맘에 쏙 드는 좋은 옷을 파는 곳의 사장님들은 하나같이 퉁명스럽다.


  처음에 동대문에 갔을 때는 말 걸기도 힘들었던 그녀들을, 시장 방문이 반복되며 이해하게 되었다. 도매손님 상대하기도 바쁜데 티셔츠 한 장 사러 온 소매손님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도매가로 달라고 떼를 쓰면 그녀들 입장에서도 난감한 일이다. 도매시장에서 소매손님에게 도매가로 물건을 팔기 시작하면 도매에서 옷을 떼와 파는 동네장사는 살아남기 힘들다. 죄다 동대문으로 갈 테니깐.


  소매 손님은 소매가로 사야 한다. 도매가와 소매가 그 중간 언저리로 살 수 있다면 행운인 거고. 좋은 옷들을 직접 보고 고를 수 있다는 거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제평에서는.




  인터넷에서 눈여겨보았던 옷이 있는데 제평의 브랜드 제품이다. 인터넷과 같은 가격으로 산다 쳐도 직접 보고 고르면 반품의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이것저것 곁눈으로 보다가 사장님께 말을 건넸다.


"사장님! 이거 얼마에 나왔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아! 저 소매예요! (씽긋)"


 종종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사다 보니 "얼마예요?" 보다는 "얼마에 나왔어요?"가 입에 붙었다. 이게 그녀들의 문법이었다. 어디서 오셨냐고 물어본다고 해서 아무 상호나 대며 도매인척 하거나 시장조사 나왔다고 말하거나... 얼렁뚱땅 도매인척하면 안 된다. 그녀들은 다 안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왼쪽 손에 든 건 36이고요 오른쪽에 들고 계신 건 38이에요." 흥정 없이 둘 다 샀다.

그래도 오늘은 인터넷 가격보다는 싸게 샀다.

소매와 도매의 중간가격, 행운인 셈이다.




 '인척'하면 안 된다. 티셔츠 낱장 사러 왔으면서 도매인척 하면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유창하게 둘러댄다 하더라도 상대방은 다 안다.


 최근에 몇몇 인간관계가 정리되며 상처를 입었다. 이놈의 인간관계는 몇 살까지 힘드려나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상대방을 탓하기보다 나를 탓했다. 내가 '인척'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들은 떠나간 건가. 티가 났었던가.


 가면을 썼었다. '인척'했다.

 날것의 나는 너무 우울한 사람이다.

 이번에는 어설프게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였던 것이 내 매력을 떨어트린 것 같아 마음이 좋질 않았다.

'인척'하지 말아야지.... 대뇌어 보았다.


너무 크게 무언가를 얻으려 말고 살아야겠다.

살면서 도매와 소매가의 '중간'정도 하면, 그것이 행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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