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병실의 공기를 지나, 행복으로.
지난주는 첫째 아이의 생일이었다.
아이의 생일 무렵이 되면, 나는 종종 오래된 기억 앞에
멈춰 서게 된다. 혼자 울컥울컥해지는 이유다.
나는 지금 9살, 6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그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꽤 긴 시간을 돌아왔다.
난임으로 오래 고생했던 나는, 지금도 시험관 시술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내 일처럼 마음을 보태게 된다.
그렇다. 서른 중반의 나는 난임이었다.
그러나 시험관 시술을 시작해, 아들 쌍둥이를 임신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임신 7개월에 접어들 무렵, 하늘나라로 아이들을 떠나보냈다.
고위험 산모였던 나는 한 달 가까이 S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보낸 그 시간은
지금 돌이켜봐도 지옥 같았다. 방송 일로 늘 바빴던 남편 대신 친정엄마가 매일같이 병실을 찾아왔다.
짐을 담아온 비닐봉투 소리가 유독 거슬려 짜증을 냈던 기억,
내 발치에서 꾸벅꾸벅 졸고 계시던 엄마의 모습,
남편이 내 배에 튼살 크림을 발라주며
“얘들아, 위로 올라가라. 엄마에게 더 가까이 올라가라.”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순간들까지—
모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실제로는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남편이 옆에 있는 게 더 편했다.
엄마는 그걸 아셨는지, 남편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가 오면, 애가 밝아지고 잘 웃으니 좋네.”
내가 그렇게 힘들던 시기에 엄마보다 남편이 옆에 있길 바랐던 이유는
엄마보다 그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내 엄마에게 느끼는 ‘미안함’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 앞에선
그 죄송한 마음조차 버거웠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그 마음이 너무 귀찮고 성가셨다.
남편은 이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할 사람이었지만 엄마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늙어가는 엄마가, 차가운 병실에서 쪽잠을 자며 내 눈치를 보고 걱정하는 모습을
나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무척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그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딸년이라니.
자식은 참 이기적인 것 같다. 아니, 모든 자식이 그렇다고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아픔을 딛고 다시 노력해 지금은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병실의 공기와 그때의 불안, 엄마를 향했던 미안함을 종종 떠올린다.
그러나 그 죄송했던 마음을 갚기보다는, 여전히 내 아이들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가끔은 나를 이기적인 딸로 느끼게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모든 시간과 감정들 덕분에
지금의 행복을 조금 더 단단하게 느낀다는 점이다.
내 엄마가 만들어준, 안전한 울타리에서 배운 그 행복을, 내 아이들과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