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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단 Mar 13. 2020

내가 쓰는 이유

정신을 놓고 있으면 새롭게 시작한 일 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체감하기 힘들다. 작년의 향기를 품은 겨울이 어느새 지나 서서히 봄의 온도가 피부를 간지럽히는 3월, 다시 한번 책상에 앉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쓸까?


무언가를 쓰는 것, 주로 연필과 펜 따위로 썼던 학창 시절과는 다른 건 지금은 타닥거리는 키보드 자판이 너무나도 익숙해졌는 것과, 공부와 학업을 위해 썼던 수만 자의 글자보다 지금은 내가 좋아서 혹은 부탁받아서 쓰는 글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어쨌든 내 글쓰기가 조금이라도 유려해졌다면 공부를 위해서든, 좋아서든, 부탁을 받아서든 의미가 있겠지.


그렇게 쓴다는 건 내게는 마치 밥을 먹는 듯한 일상이 되었다. 매일 쓰지만, 더러 포만감이 들어 건너뛰기도 한다. 뭘 쓸까 한참 메뉴를 보고 고민하기도 하고 처음에 너무나 기대해서 쓰기 시작한 메뉴가 곱씹다 보니 너무도 별로일 때도 있다. 물론 편식을 하지 않는 식습관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쓴다. 매일 찾게 되는 커피처럼 쓰디쓴 추억이 담긴 가사부터,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지는 A4 5장은 채울만한 평론, 가끔은 달콤해 보이지만 끝 맛은 아주 매운 글까지.


이렇게 밥을 먹듯 쓰다 보면 점점 '쓴다'는 것의 의미가 희미해진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 의미가 지워지기 전에 글을 쓰는 이유를 찾기 위한 일종의 메타 글쓰기다. 이전 문장 다음에 올 문장을 쓰다 순간 멍해지는 이 순간, 바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내가 쓰는 이유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언제 처음 쓰기 시작했더라?


스물두 살 겨울, 집에 남은 청하를 한 병 비우고서는 불을 끄고 침대에 앉아 16-01-23 같은 제목을 붙여놓고 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가사처럼 '지난 사랑에 겁을 잔뜩 먹은' 나는 이별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글 속으로 도망 왔던 것 같다. 오글거리고 치기 어린 그 흔적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글이 담긴 노트북은 군대에 있는 사이 기억을 삭제해버렸다.


도망치기 위해서?


문답식으로 쓰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유를 찾기 위해선 물음표가 가장 효과적이다. 도망친다기보다는 글은 내 말이 뱉지 못한 생각들을 담아두는 대나무 숲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저때 첫 대나무를 꽂고, 다시 찾아가서 꽂고, 또 꽂고 하다 보니 대나무 숲이 되었다. 요즘은 그 대나무 숲에 찾아가서 쓸만한 대나무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다듬기도 하고 새로운 걸 꽂기도 한다.


진심을 담기 위해서구나.


결론을 그렇게 빠르게 내릴 수는 없다. 진심을 담지 않은 대나무, 아니 글들도 많으니깐. 물론 말과 행동보다는 글이 훨씬 더 진솔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을 들여 꾹꾹 눌러쓴 편지처럼 고민과 생각이 담긴 글은 보통 진심을 담아 표현한다. 하지만 이별에 대한 순수한 글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수도 없이 많은 글을 쓰다 보니 진심보다 가면을 쓰고 체면을 차린 글이 더 많아졌다. 아무도 모르는 내 진짜 모습을 담았던 글이 세상에 비치는 내 모습까지 거울처럼 담아가고 있다.


그럼 진짜 이유는 뭘까?


예전에는 글이 친한 친구처럼 자존감도 회복하고 위로도 해주었는데,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쓰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조금 더 어려워진 것 같다. 글이 곧 나 자신과 같다면 글을 쓰는 이유를 찾는 건 내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처럼 철학적인 질문이 될 테니. 그러니 이데아 속의 나를 찾을 때까지 글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계속해서 써낼 수밖에 없다. 그 가상들이 마음에 든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동굴에 앉아 타자를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내가 쓰는 이유

소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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