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절

월남에서 온 상자

by 이의준평택


학교에서 돌아오니, 새로 지은 창고 앞에 커다란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창고는 스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집이었다. 형들이 얼마 전에 힘을 모아 지은 곳이다. 목수가 지은 집처럼 말끔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포근한 구석이 있었다. 그 안에는 허드렛일에 쓰는 물건들과 간단한 농기구들이 들어 있었다.

형들은 창고 대들보에 샌드백을 매달아 권투 연습을 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닷째 형이 가장 열심이었다. 그 시절 복싱과 레슬링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처럼 여겨졌다. 복싱의 김기수, 레슬링의 김일 같은 이름들이 빈곤하던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던 때였다. 나는 창고 안의 낯선 상자를 가리키며 닷째 형에게 물었다.


“저 상자는 뭐야?”

형은 월남에 다녀온 큰형의 물건이라 했다. 어제 성환역에 도착해 오늘 옮겨 놓은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귓속말로, 그 안에 별의별 게 다 들어 있다며, 특히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도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침을 뚝뚝 흘리는 개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해 질 무렵, 큰형이 창고로 들어와 빠루 망치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낙하산 천과 나일론 줄이 가득했고, 포탄 껍질을 녹여 만든 놋쇠 바도 눈에 띄었다. 통조림과 초콜릿은 마치 나를 알아본 듯 씽긋 웃고 있었다.

귀국을 얼마 앞두지 않았을 무렵, 큰형은 모아 둔 돈을 들고 사이공 시내로 외박을 나갔다. 천안의 보금당 김 사장이, 이곳에서 다이아몬드를 사 오면 한국에서 열 배는 남긴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형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현지인에게 돈 몇 푼을 쥐여 주자 다이아 중계인과 바로 연결되었다. 형은 가진 돈이 허락하는 만큼 다이아를 샀다. 그것만 있으면 빚에 허덕이던 집안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다음 날 점호 시간, 헌병 둘이 내무반으로 들어와 큰형을 데리고 나갔다. 헌병대에서 형은 구둣발과 몽둥이질을 맞으며 다이아를 샀느냐는 추궁을 받았다. 그렇다고 답하자, 밀수를 하려 했다며 또 한 번 매질이 이어졌다.


형은 밀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월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으로 산 것이라며 사정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이아는 국가 귀속이라며 모두 빼앗겼다. 그나마 영창에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하지만 헌병 몇이 다이아를 나눠 갖는 모습을 떠올리면 속이 뒤집혔다.


귀국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는데, 수중에는 남은 돈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날부터 형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전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전해 전투수당을 받았다.


쉬는 날에는 포탄 껍질을 녹여 놋쇠 바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청동은 귀한 물건이었다. 낙하산 천은 여자들의 치마나 블라우스를 만드는 데 인기가 좋아, 폐기될 물건을 어렵게 구해 모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렇게 두 달을 버텨 번 돈으로 형은 카메라와 시계를 샀다. 한국에 가면 꽤 값이 나간다는 정보였다.

형은 가족을 다시 본다는 생각 하나로, 지겨운 전쟁을 뒤로하고 귀국선에 올랐다. 긴 항해 끝에 배는 부산항에 닿았다.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고, 군악대 소리가 요란했다. 꽃다발이 목에 걸리고, 낯선 사람들과 포옹을 나누었다.


행사가 끝나고 부대로 향하는 트럭에 오르려는 순간, 꼭꼭 숨겨 두었던 카메라와 시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형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 것은, 국가에서 지급한 급료와 사방 일 미터 남짓의 형님 사물함 나무상자였다. 수많은 사연을 담고 돌아온 그 상자를 오늘, 큰형이 연 것이었다.


파월 장병들이 전쟁터에서 번 돈의 약 90퍼센트는 경제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귀속되었고, 본인에게 돌아간 것은 10퍼센트 남짓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 파월 장병 천여 명이 국가를 상대로 임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경부 고속도로가, 그들의 피 값으로 놓인 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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