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에~
지금은 부촌의 이미지가 생긴, 아니 부촌이 된 , 아니지 원래 부촌이었으나 나의 한남동은 부촌이 아니었을 뿐. 한남동은 나의 고향이다. 내가 태어나고 20대 중반까지 살았던 나의 동네. 이제 곧 대규모의 재개발이 될 지역이다. 한남동 산동네.
언제쯤인지 대략 아빠가 몇 살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고향에서 초등학교 다녔다는 얘기만 들었던 걸로 봐서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였을까? 우리 친가는 한남동에 터를 잡았었나 보다. 내가 태어난 때, 기억이 없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지만 자세히 이야기해 줄 엄마가 곁에 없다. 내 어린 시절엔 아빠의 7남매는 모두 한남동에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나의 사촌들은 모두 모여 차례를 지내고 5촌 당숙 집에도 열댓 명이 함께 인사를 다니곤 했다.
내가 살던 한남동은 신사동에서 한남대교를 넘어오면 왼쪽에 보이는 높은 동네다. 그 꼭대기에 교회가 보인다. 한광교회 나도 국민학교 시절엔 그 교회를 다녔다. 우리 집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5학년때인가 초등부에서 성경퀴즈 대회를 했는데 어쩌다 내가 일등을 했다. 정말 어쩌다가... 한데 오후 예배에 와서 대표로 퀴즈대회에 나가라고 하셨다. 맙소사 정말 어쩌다인데 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 나가고 싶지 않은 심리적 압박, 그 뒤로 한광교회와는 바이바이~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초등학생이었던 아이 걸음으로 4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 사물함이란 게 없었기 때문에 책을 모두 나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학교에서 폐품이라도 가져오라고 하는 날엔 학교 가는 길이 천리 길이였다. 그나마 도움이 되었던 건 그 길의 반이 내리막 길이였다는 거다. 물론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지만말이다. 책가방에, 도시락 가방에, 신발주머니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학교를 다녔다.
내리막길은 눈이 오면 썰매장이 되었다. 쌀포대나 비닐포대를 들고 나와 모두들 썰매를 탔다. 미끄럽다고 중간중간 살색(지금은 살구색이라고 하나)이 된 연탄재를 뿌려 놓은 집들이 있어 우리의 스릴을 막는 집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오르막을 몇 번이고 올라 내려오곤 했다. 여름이면 모기들을 쫓기 위함이었는지 뿌연 연기를 꽁무니에서 뿌리고 달리는 소독차가 나타났다. 그러면 아이들은 소독차 뒤로 따라붙어 달리기 시작한다.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말이다. 한 번씩 그 연기와 함께 사라져서 오락실로 달려가는 사촌오빠를 잡기 위해 나는 열심히도 달렸었다.
이미지 출처 : 아시안엔
아빠가 돈 500만 원을 빌려 우리 집을 계약하기 전까지 우리 네 식구는 큰집에 함께 살았다. 큰집은 공마당이라고 부르는 공터가 시작되는 골목에 마지막 집이었다. 막다른 집이라고 부르던 그 집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난 그 화장실이 너무 무서웠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있는 문이 화장실이었다. 고약한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이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물어볼 것 같았다. 거미들은 거미줄을 어쩜 그리도 잘 만들어 내는지, 저 밑에 우글거리는 저 하얗게 꿈틀거리는 생명체들이며.... 화장실 가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도 한 번씩 어깨에 기다란 봉을 매고 양쪽 끝에 커다란 양동이로 똥을 퍼서 화장실을 비워내 주시는 아저씨들이 다녀 가면 일등으로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았던 방은 창이 크고 햇볕이 잘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창은 북향이었는데도 내 기억엔 그 창으로는 빛이 들어오는 기억만 있다. 그 창의 하이라이트는 연말이었다. 내가 그 집에서 살았던 게 대략 88년도쯤이었는데 연말이면 남산에 있는 하얏트호텔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우리 가족들은 그 명당 창문으로 멋진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불꽃이 솟아올라 나에게로 막 다가오는 것 같이 큰 원형의 불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겁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서울 관광재단
여름이면 한남대교 남단 잠원동에 있는 한강수영장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온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갔다. 종일 수영장에서 놀고 수영 쉬는 타임이 되면 엄마가 손수 만들어 주신 김밥에, 치킨에 만찬을 즐겼다. 엄마는 치킨을 집에서 튀겨주시곤 했다. 2번 튀겨야 맛있다고 양념에 재어 놓은 닭을 바싹하게 튀겨 주셨다. 치킨이 아주 흔해졌지만 그때의 치킨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맛이다. 수영장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가족들은 줄줄이 한남대교를 걸어서 건너곤 했다. 수영장으로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올 때는 걸어서 집으로 왔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물에서 놀다 그대로 다리를 건넜으니 내 얼굴은 그때 많이 탄 게 그대로 착색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놀이터가 없어도 동네 골목골목이 놀이터였던 정겨운 동네. 클라이밍이 필요 없는 공마당 벽 타기, 하수구 구멍에서 동그란 딱지 치기, 특별한 약속 없이 집 앞 골목만 나와도 친구들이 있었던 소중한 시절이 있는 그 시절, 나의 한남동을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