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남동 #2
내가 어릴 적, 한남동에는 두 개의 시장이 있었다. 한남 시장과 도깨비 시장.
한남 시장은 한남동의 평지에 있었고 도깨비시장은 한남동의 꼭대기에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장은 도깨비시장. 우리 엄마는 도깨비 시장을 이용했다. 어릴 적 나에게 있어서 시장은 엄마를 따라 무엇을 사러 가는
것이 주가 아닌 사람을 구경하러 가는 곳이었다.
엄마와 시장을 보러 언덕길을 오른다. 골목골목 계단을 오른다. 연속된 좁다란 계단들과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짠! 하고 나타나는 시장! 한남동의 꼭대기에 오른 것이다. 이게 산이였으면 시장은 산의 정상이었을 것이다. 산등성이에 시장이 있는 모양새다. 산등성이를 따라 가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리 큰 시장도 아니다. 딱 동네 시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도깨비시장에 가면 사람 냄새가 난다.
가게에 딸려 있는 방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바빠지면 나와서 손님을 맞는다. 자연스레 그 가게 가족들의 구성원을 알게 된다.
시장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과일 가게는 가장 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주머니 아저씨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크게 부자 같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다른 가게들보다는 깔끔했다. 팔고 있는 게 과일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기억에 그 집에는 나보다 언니들인 딸이 둘인가 있었는데 가끔 그녀들이 부럽기도 했다.
단지 시장에서 가장 깨끗하고 큰 가게라는 이유로 말이다.
과일 가게 옆에는 정육점이 있다. 빨간 조명 아래 늘어져 있는 고기들, 그중에 제일은 삼겹살이다.
고기 진열대 앞에 빨간 고무대야들이 쭉 늘어서 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담겨 있다. 빨간 소의 간 선지, 검은색의 소의 위부분인 천엽이다. 어릴 적에는 그 이름과 소의 어떤 부위인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정육점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색상과 모양새 때문에 괴롭긴 했었다. (저렇게 생긴 걸 먹다니.)
시장으로 들어선 길에서 오른쪽으로 생선가게가 있었다. 엄마는 고등어, 갈치, 오징어, 동태 등 생선을 자주 샀는데 아주머니가 뭉툭하면서도 넓적한 칼로 생선들을 손질하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 보였다.
칼로 생선의 표면을 긁어내고 생선 지느러미를 잘라낸다. 탕탕 칼로 생선을 내리쳐서 도막을 낸다.
중간 배를 갈라 내장을 쓱쓱 분리해 낸다. 생선의 손질이 끝나면 동그랗고 커다란 통나무 도마에 칼을 턱 하고 꽂아두는 것으로 생선쇼는 끝이 난다.
조금 더 나아가 야채 가게에 가면 항상 피곤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계신다. 그 옆에는 말끔하게 양복을 입고 광이 나는 구두까지 신으신 아저씨가 계신다. 구두의 광만큼이나 얼굴에서도 광이 난다. 두 분은 부부다. 어찌 부부의 차림새가 그리도 차이가 나는지..... 엄마의 중얼거리는 짧은 이야기로 두 분의 분위기를 알아차린다. 엄마는 딱히 이러쿵저러쿵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못마땅한 상황에서의 혼잣말 한마디다. 나도 더 묻지 않는다. 다만 그분들을 볼 때마다 속상한 마음만 들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때부터 난 그 아저씨를 미워했었다.
엄마가 장을 보면서 아주머니들과 나누는 이야기들, 오며 가며 만나는 엄마의 지인들과의 최근 이야기들 그 어른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어른들이 갑자기 소리를 줄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면 내 귀는 소머즈의 귀가 된다. 그 비밀스러움이란!
시장의 끝에는 마주한 두 약국이 있다. 가정약국과 덕천약국이다. 가정약국은 이름처럼 가정적이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 약사분이 계신다. 약국에는 양약만 있지 않고 한약 약재도 있다. 초등학교 때 나는 축농증이 심했다. 엄마는 나를 여기저기 괜찮다는 이비인후과를 데리고 다녔는데 나아지지 않자 가정약국에서 한약을 지어 왔다. 지금이야 한약을 다 달여서 먹기 좋게 한 봉씩 담아 주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엄마는 옹기 약탕기에 한약을 다녀 면포에 걸러내고 막대기 두 개를 집어 꼭꼭 짜내 한 대접씩 건네주었다. 엄마도 한참 아팠던 시기다. 엄마의 곱은 손으로 약을 짜내어 주면 구역질을 할망정 입에 꼴깍꼴깍 안 넣을 수가 없었다. 그 정성 때문이었는지 내 축농증은 사라졌다.
그때부터였을까 우리 가족은 가정약국 약사님을 완전히 신뢰했다. 가끔 약사님께 증상을 이야기하면
“낮에 ㅇㅇ 먹었지?”
하는 약사님의 말에 신통하다고 어떻게 그걸 알아내신냐고 동생과 나는 아주 신기해했다.
가정약국이 가정스럽다면 덕천약국은 병원스러웠다. 약사 가운을 꼭 챙겨 입으시고 지금과 비슷한 약국 모양을 하고 있었다. 덕천약국의 약이 가정약국과 별다르지 않은 약국이었을 텐데도 우린 가정약국만 갔다.
약국 앞에서 한남동 꼭대기 한광 교회 쪽으로 가다 보면 중국집이 하나 있다. 멋들어진 중국요릿집이 아닌 중국집. 외식이란 걸 잘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곗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곗날이 오면 엄마가 참석해 있는 이 중국집으로 향한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중국집의 방안에 모인다. 나는 엄마가 먼저 주문해 놓은 짜장면 한 그릇을 매장 테이블에서 동생과 나누어 먹는다. 그때 짜장면의 꿀맛이란! 곗날이 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중국집이 있을까?
한남동을 떠나 오고서도 어릴 적 엄마와 다니던 시장에 대한 향수는 남아 있다.
독립문역 부근에 있는 영천시장 떡볶이를 좋아했고, 지금은 자주는 아니어도 집에서 가까운 통인시장에 종종 간다. 반찬 가게 아주머니에게 몇 가지 반찬거리를 사며 아이들이 밥을 잘 안 먹는다는 얘기, 일하며 밥 해 먹기 힘들다는 푸념을 하다 보면 내 장바구니로 쓱 밀어 넣어주시는 콩나물 무침 한팩이 눈물겹게 따스하다. 매번 명절이나 제사 때 가는 생선가게 아주머니는 이제는 나를 알아봐 주신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며 아이들이 먹기 좋은 부드러운 고기요리 방법을 듣고, 언제나 빠질 수 없는 떡볶이를 사며 통인시장의 요즘 경기를 듣는다.
시장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오래된 나의 동네 사람들이 아니어도 사람 냄새가 난다. 이제는 생활이 되어 버린 인터넷 장보기를 하다가도 한 번씩 시장에 가는 이유는 엄마와 함께 했던 시장의 추억, 이제는 어른이 되어 가는 시장의 느낌, 그 긴 시간으로 이어진 공간의 추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