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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로 Feb 12. 2023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저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부탁이란 사전적으로 어떤 일을 청하거나 맡긴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개인적으로 부탁한다는 말을 내뱉을 땐 미안함이나 고마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맞다면 청한다는 말은 부탁이란 단어와 어울리지만 맡긴다는 말은 다르게 느껴진다. "이것 좀 해라"는 강압적인 태도의 맡김도 부탁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로 미안함이나 고마움 없이도 부탁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부탁을 받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뜻이 맞다면 나는 부탁이란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부탁이란 단어를 탕수육처럼 소, 중, 대로 나눠버리고 싶다. 부탁의 가치를 돈으로 지불할 수는 없지만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말이다. 소부탁은 어떤 일을 맡기기만 하는 것, 중부탁은 어떤 일을 정중히 맡기거나 청하는 것, 대부탁은 어떤 일을 맡기거나 청할 때 미안함 혹은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소부탁 좀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상대가 고마움이나 미안함 없이 그냥 일을 맡기는구나 하고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쓸데없는 말꼬리는 고객이 어떤 일을 부탁했지만 나는 그냥 맡겼다고 느낀 사건 때문이다.  


금요일 오후 4시, 고객이 부탁을 했다. "과장님, 이 시험 월요일까지 결과 정리가 필요한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살짝 내려가는 눈꼬리와 올라가는 입꼬리, 고무적인 말투가 섞여 내가 생각하는 '부탁'의 의미를 지켜주는 고객이다. 선물을 주고 받듯이  답했다. "아닙니다, 항상 도와주시는데 당연히 도와야죠". 나 역시 윗니를 살짝 내보이며 눈웃음쳤다. 훈훈한 분위기가 싫었는지 옆에 있던 다른 고객이 한 마디 던진다. "과장님 테스트 시간은 얼마 안 걸려요." 위로하거나 안심시키는 말로 들리진 않았다. 나는 시험실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인지 그 한 마디가 심장의 온도를 높인다. 뻔히 보이는 금요일 야근에 울화가 끓기 직전이다. 결과자료까지 만든다 치면 10시까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고객은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눈꼬리와 입꼬리를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과장님, 사실 월요일 아침 열 시까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결국 고객의 부탁은 이것이다. 나는 금요일 야근을 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일을 과장님께서 금요일 퇴근 한 시간 전부터 시작해서 월요일 아침까지 끝내 달라는 말이다. 이러니 나는 부탁보단  그냥 일을 맡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착하지도 이해심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피하고 싶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니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야근은 당연히 하게 된다. 이해한다. 내 일은 아니지만 고객의 일이니 열심히 할 필요까지 있다. 이성적으로는 말이다. 적어도 목요일이었다면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고객의 일이 나의 일이라고 속이면서 억지로 멘탈을 잡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알기 때문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 즐거운 척하기로 했다. 아니, 최면을 걸어 진짜 즐겁기로 마음먹었다.


그 모든 다짐은 마지막 악수를 나누고 눈을 마주칠 때 끝났다. 분노를 잡고 있던 실끈이 툭하고 끊어졌다. "오늘 하실 건가요? 주말에 하실 건가요?" 암묵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이지 않나? "중간에 시험 완료되면 늦게라도 연락 주세요"라고 하는 건.. 오늘까지 끝내달란 말인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심지어 정색하면서 말하는 건 부탁이 아니라 지시 아닌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오늘까지 끝낼 생각이었다. 이미 불금의 약속도 취소를 결심했다. 결국 분노라는 감정에 KO패 당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을 잘(억지로) 처리했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즐거운 척하면서 10시까지 야근을 했다. 결과 자료도 고객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만들어서 보냈다. 고객은 부탁에 값을 전화로 지불했다. "과장님, 지금까지 시험하신 거예요? 죄송하고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밥 살게요". 고객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대부탁을 받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객이 이해된다. 그만큼 중요하고 급한 일이었다. 고객은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다만 서운함이 컸다. 고객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니 적어도 같이 했으면 했다. 모든 걸 떠넘기는 듯한 느낌이 싫었다. 특히 혼자 하는 금요일 야근이 가장 싫었다.


사실 분노할 자격이 없다. 생각해 보니 협력사 직원들에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름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긴 하지만 그분들도 그렇게 느꼈을까? 그분들이 원하는 태도로 부탁을 했을까? 부탁한 만큼 그분들의 부탁을 들어줬을까?. 협력사 직원들은 나에게 원하는 결과를 줘야 한다. 내가 뱉은 "부탁드릴게요"라는 한 마디에 나처럼 야근을 하기도, 어려운 일을 힘들게 처리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내가 화가 났던 건 나 자신이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고객이 부탁했을 때 이미 손해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부탁의 기준을 나누고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대가를 내야 한다 말한 내가 경솔하다 느껴진다. 이렇게 생각해도 보통 부탁을 받으면 싫을 테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생각들을 했으니 부탁할 때는 신중하게, 어떤 일이든 대부탁으로 해보자고 결심해 본다.


사실 부탁의 사전적 의미는 죄가 없이 깔끔했다. 금요일, 그저 내가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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