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알고 있던 생각과 믿음이 바뀌다.
이직 후 오랫동안 멋지게 빛날 것 같던 나의 세상에 빛이 사라져 갔다.
정신없이 업무 관련 전문성을 키우는데만 집중하다 보니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고, 내가 속해 있던 해양플렌트라는 산업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결국 회사는 구조조정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항상 바쁘고 생기 넘치게 돌아가던 사무실에는 구조조정이 시작된다는 소문에 침울함이 감돌았다. 입사 후 몇 년 간 넘쳐 났던 업무들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담당하는 업무가 줄어들기 시작하니 결국 몇 개의 팀을 합쳐 하나로 만들고 소속 인원들에 대해서는 인력 재배치를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사원, 대리 급 인원은 일감이 있는 다른 팀이나 타 사업부로 전출 명령이 났다. 반면, 나이가 있으신 차장, 부장님들은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이라는 회사는 IMF 시기에도 임의적인 구조조정이 없었던 회사로 안전성만큼은 국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는 생소하면서도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유가 하락 소식으로 인한 조선업 침체 소식과 해당분야의 젊은 인재들의 유출이 가속화돼 가고 있다는 기사는, 해양플렌트 설계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서 평생의 업으로 삼고자 했던 20대 젊은 청년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며 가정을 이루어 정착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미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이직을 통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미래가 유망한 분야로 이동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이직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한번 이직을 해 봤기 때문에 다시 이직 준비를 한다는 것이 좀처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나의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구조물의 설계를 했던 경력으로 이직을 하거나 다른 일을 찾아보기에는 관련된 분야의 업황이 대부분 좋지 못했다. 몇몇의 동기들은 대형 건설사나 국내 플렌트 제작 업체로 이직을 하거나 합격이 보장되지 않은 전문자격증을 따기 위해 기나긴 수험생활을 택했다.
그렇게 몇 개월간의 방황기를 거치고 있던 찰나 그룹 내부에서 타계열사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조선, 해양플렌트 외에도 지상플렌트, 건설기계장비, 태양광, 변압기 제조, 산업용 로봇 등 여러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계열사의 포지션을 보던 중 로봇 설계라는 직무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업무였던 해양플렌트 설계와는 전혀 다른 분야지만 열심히 관련 업무에 대해 공부해 나간다면 로봇이라는 카테고리는 업의 영역으로 봤을 때 상당히 메리트가 있어 보였다. 대학교 전공과 지금까지 쌓아 왔던 커리어를 포기해야 한다는 리스크를 감안해야 하지만, 빠르게 변화할 미래를 위해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현대중공업 그룹의 작은 사업부 중 하나였던 로봇사업부의 설계팀으로 계열사 이동을 신청하게 되었고, 서류 전형과 면접전형을 거쳐 계열사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전공하고 관련분야로 쌓아 왔던 경력을 모두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겪으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업무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렇게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 나의 기나긴 커리어 생존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