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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스무비 Dec 01. 2021

‘리슨’ 당신이 듣지 않은 이야기가 빚어낸 상실과 고통

[리뷰] ‘리슨’ 당신이 듣지 않은 이야기가 빚어낸 상실과 고통

‘강제’와 ‘입양’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지만, ‘강제 입양’은 현실 속에서 실재한다. 영화 ‘리슨’은 강제 입양 실화를 바탕으로, 진정한 이해와 소통이 부재한 사회 시스템에 의해 무너져가는 한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데뷔작 ‘리슨’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2관왕에 오른 아나 로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켄 로치 감독의 명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영화 '리슨' 스틸. 사진 워터홀컴퍼니


가난한 포르투갈 이민자 출신으로 런던 교외에서 3남매를 키우며 살아가는 벨라(루시아 모니즈). 그는 어느 날 복지국의 갑작스러운 통보로 아이들을 보호기관에 빼앗긴다. 청각장애를 가진 딸 루(메이지 슬라이)의 몸에 난 멍자국이 당국의 오해를 부르고, 아이들이 강제 입양 절차를 밟게 된 것. 자신과 남편의 가난과 실직은 물론, 딸의 장애에도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사회 시스템은 어처구니 주장을 펼치며 한 순간에 그와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다.

영화 ‘리슨’(감독 아나 로샤)은 루 가족의 가난과 실직, 그리고 장애에도 아무런 귀를 기울여주지 않던 세상과 이들의 헤어짐을 그렸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강제 입양 사건이 바탕 된 작품으로, 영화는 지난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미래의 사자상을 수상했다. 신예 아나 로샤 감독의 데뷔작으로,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콜린 퍼스와 호흡을 맞췄던 포르투갈 국민 배우 루시아 모니즈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가난과 불안이 가득한 벨라 가족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포르투갈에서 이민 와 런던 교외에서 살고 있는 벨라 가족은 계속되는 실직과 밀려만 가는 월급에 빵 한 조각도 쉽게 사먹지 못한다. 허나 그런 벨라 가족에게 정부 당국은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 ‘복지국’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음에도 그들은 벨라와 가족에게 이상적인 모습만을 강요할 뿐,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없다.

영화 '리슨' 스틸. 사진 워터홀컴퍼니


그렇게 한번을 귀 기울이지 않던 복지국은 딸의 몸에 멍이 든 것을 본 교사의 신고로 단번에 그들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가정 폭력이 ‘의심’된다는 누군가의 추측은 손쉽게 사실이 돼 가족을 흩어놓고, 아이들은 원치 않는 강제 입양 절차를 밟게 된다.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없는 사회 시스템의 병폐는 딸 루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미지로 환원된다. 루의 등에 생긴 멍을 보고 아이들을 빼앗은 당국이지만, 정작 루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는 않는다.

농아인 루는 영어를 제외한 어떤 ‘다른 언어’도 사용할 수 없는 정부 기관에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심지어 벨라와의 면회에서도 감독관은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향해 영어만을 사용하라며 엄포를 놓는다.

당국은 원리원칙과 시스템이라는 손쉬운 변명으로 한 가족의 삶에 짙은 멍을 새겨놓곤 그네들의 행태를 정당화한다. 구조는 경직돼 있고, 삶을 위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냉대와 무관심, 몰이해로 일관하다 우연히 그물에 걸린 작은 계기만으로 모든 것을 일반화하는 폭력의 연쇄고리. 벨라의 가족은 이에 대항할 힘이 없다.

영화 '리슨' 스틸. 사진 워터홀컴퍼니


얼핏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가 떠오른다. 소통이 부재한 제도적 폭력이 인간성을 말살해가는 냉혹한 현실을 그렸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리슨’은 켄 로치 감독이 꼬집었던, 그러나 여전히 몰이해와 병폐만이 가득한 사회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다시 한번 들춰낸다.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영화는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끔찍한 비인륜적 행위를 자행한 주체가 상부(나치)의 명령에 순응한 ‘평범한’ 이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한 ‘악의 평범성’. ‘리슨’에 그려진 복지국의 인물들은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들의 행위가 벨라 가족에게 어떤 여파를 미칠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시스템은 작동했고, 그들은 ‘잘리지’ 않기 위해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타인의 생각도, 사정도 알 수 없기에 대화를 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입과 귀를 연다. 소통이야말로 이해와 공감의 시작이며, 가난도, 질병도 아닌 소통의 부재가 사람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허울 좋은 제도를 내세우며 사람들의 복지와 안녕을 말하는 사회 시스템이란 실상 하염없이 비인간적이다.

영화 '리슨' 스틸. 사진 워터홀컴퍼니


영화 ‘리슨’은 그런 비인간적 관료주의 위에서 위태로이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작품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 무너져가는 한 가족의 일상이 폐부를 찌른다. 순수함만이 엿보이는 루의 푸른 눈 뒤로 짙은 슬픔이 샘솟는다.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종국에는 모두가 모두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도록. 영화는 딱딱해가는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개봉: 12월 9일/관람등급: 12세 이상관람가/감독: 아나 로샤/출연: 루시아 모니즈, 메이지 슬라이, 소피아 마일즈, 루벤 가르시아/수입∙배급: 워터홀컴퍼니㈜/러닝타임: 78분/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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