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피그’ 상실을 온 몸으로 마주하는 따뜻한 복수극
할리우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신작 ‘피그’가 개봉 소식을 알렸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26년만에 오스카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화제를 부른 ‘피그’. 영화는 삶의 아픔과 고독, 상실과 절망을 온 몸으로 마주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따라 휘몰아치는 인생의 파도에 상처 입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영화 '피그' 스틸. 사진 판씨네마
이름을 버리고 홀로 숲 속에서 트러플 돼지와 살던 롭(니콜라스 케이지). 그를 방문하는 사람은 젊은 푸드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 뿐이다. 한가로이 돼지와 함께 적막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밤, 천둥 같은 트럭 소리와 함께 낯선 이들이 그의 집을 습격하고, 소중한 돼지를 훔쳐간다. 돼지를 되찾기 위해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15년 전 떠난 포틀랜드로 발걸음을 향하는 롭. 그곳에서 그는 한때 가까웠지만, 이제는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돼지의 행방을 묻기 시작한다.
영화 ‘피그’(감독 마이클 사노스키)는 이름을 버린 남자 롭이 사라진 트러플 돼지와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전 세계 시상식과 각종 영화제에서 화려한 수상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는 작품으로, 영화는 현재까지 31관왕, 67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로 선정됐다. 특히 니콜라스 케이지는 지난 몇 해 동안의 부진을 떨치고 ‘피그’를 통해 대 배우의 아우라를 펼치며 오는 미국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영화 '피그' 스틸. 사진 판씨네마
포스터만 두고 보면 얼핏 ‘피그’는 ‘존윅’을 연상시킨다. 피투성이의 수염 가득한 중년이 잃어버린 돼지를 찾아 자신의 과거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기본적인 플롯인 만큼, 어쩌면 관객들은 ‘피그’에 화려한 액션이나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가 그려지길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그’는 그와 같은 장르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가슴 깊이 위로를 전하는 따뜻한 드라마다.
물론 ‘따뜻한 위로’란 훔쳐간 돼지를 찾아나서는 피투성이 남성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도입부에선 약간의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특히 돼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도시의 지하 투기장, 파이트 클럽을 찾을 때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이름을 지웠던 롭은 오로지 돼지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다시 세간에 새겨 넣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동안 감췄던 투사의 본능을 일깨우는 듯 하다.
영화 '피그' 스틸. 사진 판씨네마
그렇게 관객으로 하여금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재미가 펼쳐지리라 기대하게 했던 ‘피그’는 스릴러와 서스펜스에서 드라마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흘려 보낸다. 롭은 뒷세계의 거물도, 한때 이름을 날렸던 투기장의 싸움꾼도 아니었으며, 그저 거구의 요리사였다. 그는 돼지를 향한 이유 모를 집착으로 포틀랜드의 요식업계를 들쑤시는데,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대화가 퍽 마음을 울린다.
롭은 과거 그의 위명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아냥대던 이를 향해 오롯이 서 있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떨치기도 하고, 진정한 자신의 꿈을 잃고 세간의 평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던 옛 직원과 진정한 삶에 대해 짚어보기도 한다. 이 과정들로부터 영화 ‘피그’는 상당한 무게감을 얻는다. 특별할 것 없이 과거의 발자취를 쫓아 대화만을 이어가는 롭과 아미르의 로드무비는 보는 이의 마음을 조금씩 훑어낸다.
영화 '피그' 스틸. 사진 판씨네마
허나 ‘피그’가 전하는 진정한 울림과 감동은 롭과 대적하는 이이자, 돼지를 훔쳐간 범인과 만나는 시퀀스로부터 기인한다. 돈을 줄 테니 얌전히 떠나라는 범인의 말에 롭은 분노하지도, 억울함에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과거 그가 요리를 해줬던 이가 진심으로 행복해했던 날을 떠올리며, 그날의 음식을 다시 한번 그 손님 앞에 가져다 준다. 롭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대적자에게 분노와 갈등, 혐오의 눈빛을 발하는 대신, 되레 그의 지난 사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로부터 영화는 상실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다 이내 잡식돼 어딘가 비틀어진 이의 마음에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영화는 롭이 누군가를 위로하며 상처를 직면하게 했던 것과 같이 롭 역시 지난 상처를 직면하게 한다. 그리하여 ‘피그’는 누군가의 과거와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상실을 온 몸으로 마주해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천천히, 그러나 조금도 놓치는 감정 없이, 영화는 면밀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 보는 이의 마음에 풍덩 빠져든다.
영화 '피그' 스틸. 사진 판씨네마
어쩌면 유난히 잔잔한 전개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너무나 심오한 대화에 거부감이 일수도 있다. 그러나 구태여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그리는 인생의 회한이 가득한 그 눈빛을 따라 조금씩 마음을 맡기다보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 외면하고, 애써 모른척 했던 죄책감과 슬픔, 고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용서하고 보듬으며, 위로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피그’는 그리하여 관객의 마음을 넉넉히 한다.
개봉: 2월 23일/ 관람등급: 12세이상관람가/감독: 마이클 사노스키/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알렉스 울프, 아담 아킨, 다리우스 피어스, 데이비드 넬 /수입·배급: 판씨네마㈜/러닝타임: 92분/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