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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스무비 Jul 07. 2021

피의 카니발과 조롱당하는 신앙 ‘랑종’

[리뷰] 피의 카니발과 조롱당하는 신앙 ‘랑종’

공포 영화 공식에 질릴 대로 질려 웬만한 작품에는 하품만을 내뱉고 있는 이들을 위해 ‘랑종’이 개봉 소식을 알렸다. 태국의 봉준호 감독이라 불리는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곡성’, ‘추격자’ 등의 나홍진 감독이 제작과 원안을 맡은 작품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현실감을 더해 섬뜩함을 넘어 숨 막히는 공포를 전했다.

영화 '랑종' 스틸. 사진 쇼박스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에 이르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인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씨와니 우툼마)은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밍은 날이 갈수록 이상 증세가 심각해진다. 무당을 취재하기 위해 님과 동행했던 촬영 팀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영화 ‘랑종’(감독 반종 피산다나쿤)은 태국 산골마을, 신내림이 대물림 되는 무당 가문의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을 그렸다. ‘곡성’, ‘추격자’등을 선보였던 나홍진 감독이 제작과 기획, 시나리오 원안을 맡은 작품으로, 태국 이산 지역의 낯선 풍광과 스산한 분위기, 미스터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감상을 남기는 랑종(무당) 가문의 역사와 이야기가 보는 이의 심장을 단숨에 움켜쥔다.

영화 '랑종' 스틸. 사진 쇼박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시작하는 ‘랑종’에 몇몇 관객은 기대보다 실망을 금치 못할 수 있다. 여느 교양 프로그램에서 봤던 모습을 스크린으로 만나니 두려움보단 지루하지 않을지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감히 단언하건대,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필요 없는 노파심에 불과하다. 낯선 태국 이산 마을의 풍광과 랑종 가문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어느새 관객의 손과 발을 묶어둔 채 서서히 목을 조여오고 있는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 공포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다 못해 남발하다시피 활용되는 점프 스케어(jump scare, 갑자기 공포 요소를 등장시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영화 기법)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몰골을 한 괴물이나, 귀신 따위가 등장하진 않는다. 학살 현장이 그려지거나, 시산혈해가 펼쳐지지도 않으며, 카메라는 그저 신내림이 대물림 되고 있는 현장을 담아낸다.

영화 '랑종' 스틸. 사진 쇼박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종’은 결국 일전에 만났던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섬뜩하고, 두려운 감상을 남겼다. 다큐멘터리 팀의 시선으로 차분하게 담아낸 무당 가문의 역사와 혼란스러운 오늘은 실제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인 양, 보는 이를 착각하게 만든다. 부지불식간에 조여오는 섬뜩한 전개와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숨죽인 채 이야기를 따르게 하고, ‘대물림 되는 신내림’이라는 다큐멘터리 팀의 아이템은 어느새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며 호기심을 돋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은 끝까지 이어지며 영화에 현실감을 더하는데, 태국 내에서 피부색에 따라 사회적 계급이 나뉘던 것이나, 학살, 저주 등을 암시하는 다양한 장치가 특히 그렇다. 저도 모르게 영화 속 세계를 체험하고 있던 차, 영화의 중반부터 쉴 틈 없이 단숨에 치고 들어오는 급격한 이야기는 관객을 압도하더니, 존속살해와 근친상간, 식인, 동물 학대를 비롯한 온갖 혐오스러운 요소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영화 '랑종' 스틸. 사진 쇼박스


한편,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의 조카 밍을 연기한 나릴야 군몽콘켓의 연기는 압권이다. 뒤틀린 사지와 까뒤집은 흰자위는 광기를 넘어 움직임 하나하나에 피 내음과 악의(惡意)가 물씬 풍긴다. 결말부에 이르러 그려지는 그의 모습은 가히 짐승 그 자체다. 분명 빼빼 마른 여성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밍은 존재 자체만으로 관객의 숨통을 조여온다.

물론 ‘랑종’이라 하여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특정 장면에선 캐릭터들의 다소 답답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이어지기도 하고, 구성은 치밀한 편이나 허술함이 묻어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귀신에 홀린 이들에 의해 내장이 흘러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카메라는 놓지 않는 카메라맨의 모습이나, 관객을 벼랑 끝으로 내몰기 위한 결말부의 편의적 선택 역시 아쉽다.

영화 '랑종' 스틸. 사진 쇼박스


허나 그런 사소한 사안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구태여 아쉬운 점을 꼽아봤지만, 사실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는 누구도 신경 쓰이지 않을 것들이다. 공포 영화로서, 상업 영화로서, ‘랑종’은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결말부에 이르러 펼쳐지는 피의 카니발과 끊임없이 추락하고 조롱당하는 신앙은 가히 압도적이라 평할 만하다.

“’곡성’은 코미디”라는 나홍진 감독의 말마따나, ‘랑종’은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두려운 감상을 남긴다. 손에 땀을 쥐는 것을 넘어, 온몸에 핏기가 가신다. 131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이다지도 습하고, 시린, 숨을 턱 하니 막아버리는 공포영화라니. ‘랑종’을 선물해준 나홍진 감독과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에 박수를 보낸다.


개봉: 7월 14일/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감독: 반종 피산다나쿤/출연: 나릴야 군몽콘켓, 싸와니 우툼마/제작: ㈜노던크로스, GDH/배급: (주)쇼박스/러닝타임: 131분/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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