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남부 여행 둘째 날
전날, 남편은 안탈리아에서 보이는 멋진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산에 꼭 가보고 싶다. 멋지다.”
보통 뭔가를 꼭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 당연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간 나도 모르게 “산? 등산?”이라고 되물을 뻔한걸 꾹 참고 신나는 미소를 띄며, “좋아, 당신이 알아봐. 어떻게 가면 되는지!“라고 말했다. 아마 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매우 자연스럽고 경쾌하게 대답했으니까 하하.
다음날 아침, 남편은 이미 하이킹 정보를 다 찾아놓고 있었다.
“왕복 두 시간 정도래. 조식 먹고 바로 가자.”
아침 7시였다. 한낮에는 바다 수영이 가능한 따뜻한 안탈리아였지만, 아침과 저녁엔 매섭게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어젯밤 발코니에 널어둔 수영복이 날아가 발코니 구석에 걸려 있던 걸 간신히 건져온 참이었다.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시원하게 다녀오면 좋잖아.”라고 그가 말했다.
문제는 내 신발이었다. 남편과 아들은 운동화를 챙겨왔는데, 나는 샌들만 신고 온 것이었다. 보통 여행에는 꼭 운동화를 챙기는데, 이번에는 ‘지중해’와 ‘휴양’만 생각한 바람에 깜빡했던 것이다.
“운동화 없이 갈 수 있는 코스 같아?”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샌들로는 무리야. 발목 다칠걸.”
“그럼 운동화를 사야겠네. 몰에 가면 있을 거야. 가게들이 열면 바로 사서 가자. 그런데 어쩌지, 가게는 10시는 되어야 열텐데...”
"흠. 어쩔 수 없지 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하이킹을 할 거라면 따뜻한 낮이 좋았다. 남편은 시원할 때 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햇살이 있는 게 좋았다. 10월의 안탈리아는 더운 대신 온화했고. 바람 부는 어둑한 산길은 질색이었다. 조식을 천천히 마친 뒤, 몰에 들러 운동화를 한 켤레 샀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서야 산에 다다랐다.
남편이 찾아본 곳은 귤룩산 테르메소스 국립공원(Güllük Mountain Termessos National Park)이었다.
터키 남부의 토로스 산맥(Taurus Mountains) 서쪽 자락에 자리한 곳으로,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속에 고대 '테르메소스(Termessos)' 고대 도시의 유적이 남아 있는 독특한 장소였다.
토로스 산맥은 터키 남부를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마치 방패처럼 지중해와 내륙을 가르는 거대한 산맥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천연의 요새로 불렸고, 지금도 그 험준함과 위용 때문에 터키의 ‘등뼈’라고 불린다고 한다. 차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산맥의 능선은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처럼 겹겹이 밀려왔다. 회색빛 바위와 초록빛 숲이 맞닿은 풍경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붓으로 그려낸 듯 웅장했다.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숨을 고르며, 장대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산 중턱까지 사이클링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람을 가르며 자연을 만끽하고 달리는 모습이 멋있고 참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해발 1,000미터 높이의 고지대에 고대 도시가 있다니, 궁금증이 솟아났다. 산 정상 바로 아래의 거대한 고대 극장을 보기 위해서는 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를 하이킹을 해야 했다. 내려오는 것까지 합하면 2~3시간짜리 코스였다. 주차장 근처부터 이미 고대 도시의 수조(water tank)와 아르테미스 신전의 흔적이 보여, 묘한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아이와 함께 하이킹을 하는 건 - 내가 이렇게 등산하는걸 좋아하지 않음에도 처음은 아니었다. 의외로 꽤 여러 번이었다. 홍콩이라고 하면 다들 빽빽한 도시숲만을 생각하지만, 홍콩은 아름다운 자연이 아주 가까워, 온갖 수상 스포츠와 완만한 등선의 하이킹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많은 사람들이 하이킹을 한다. 그런 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산에 오르지 않기란 오히려 어려운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제대로 된 등산은, 아이가 네 살쯤 되었을 때였나, 얼떨결에 교회 등산 모임에 가족이 참가했다가 세 시간 넘게 하이킹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아이 걸음 기준 세 시간.) 그때 나는 엄마로서의 초인적인 힘을 느꼈다. 끝까지 완주를 하겠다고 아빠와 걷는 씩씩한 아이 앞에서 힘들다고 투정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이 "오, 잘 걷는데?"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으느, 그른그아느..."하고 웃어보였다. 말 걸지 말아줘... 내 인생에 한 번도 툴툴대지 않고 입 꾹 다물고 등산을 했던 경험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이와 남편과 셋이 자연 속을 완전히 만끽하고 모험했던 그 경험이 너무도 특별하고 좋았다.
또 한 번은 작년 가을이었다. 홍콩의 아이 학교에서 필드 트립으로 하이킹을 갔다. 여섯살 반 아이들의 하이킹이라 봤자 피크닉 정도겠지 싶었는데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는 미국식 학교답게 코스는 생각보다 길었다. 함께 갔던 학부모들 모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야생 멧돼지도 보고.. 그 와중에 아이들은 각자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걸었다. 부모가 대신 들어주려 하면, 선생님은 반드시 “스스로 메야 해요”라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하지 못했던 걸 아이가 배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감사하고 대견했다.
이번에도 역시 아들은 나보다 산을 훨씬 잘 탔다. 그 모습은 흡사 날다람쥐 같았다. 아이는 자꾸 버벅거리는 나를 도와주려 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엄마는 정말 괜찮아. 너는 아빠랑 먼저 올라가렴.” 아무래도 씩씩한 아빠를 닮은 것 같아 다행이다.
토로스 산맥은 터키 남부를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산맥으로, 약 6천만~7천만 년 전, 아라비아판이 북쪽으로 이동해 유라시아판(지중해판의 일부)에 부딪히면서 생겨난 거대한 융기 지형이라고 한다. 그 충돌로 인해 바닷속 석회암층이 지상으로 드러났고, 그 결과 토로스 산맥은 흙보다 돌이 훨씬 많은 회색빛 석회암 산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지질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 테르메소스는, 해발 1,000미터의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형성된 아슬아슬한 도시였다. 하지만 그건 산의 기반이 단단한 석회암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건축에 쓰인 돌들은 이 산에서 바로 채석한 것이었고, 그 돌 위에, 그 돌들로 지어진 도시였기 때문에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도시의 흔적이 흙 속에 묻히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폐허가 된 지금도 테르메소스 유적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 산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이킹 도중 불현듯 나타나는 돌기둥과 석벽, 부서진 기둥 조각들은 그 자체로 시간의 파편처럼 느껴졌다.
또한 터키 남부의 색다른 나무와 꽃들, 풍경과 곤충, 도마뱀 등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자연을 만끽하는 하이킹과 유적 탐방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1석 2조의 여행 코스였다.
그렇게 산을 올라가다보면 드디어, The theator라고 하는 푯말이 보인다. 저 길 끝에는 해발 1,000미터 높이에 세워진, 테르메소스 유적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 — 고대 석조 극장이 있다! (다음 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