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남부 여행 둘째 날
터키는 참으로 '유적의 나라'다. 고대 로마 이전의 도시부터,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그리고 이슬람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 수천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가 여행했던 남부 지역만 보아도, 구글 지도에 ancient ruins, ancient city라고 검색하면 수없이 많은 점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물론 이런 원형 극장은 터키 고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흔한' 구조물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해발 1,000미터의 산을 오르며 만난 유적은 그 의미와 감동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드디어 토로스 산 정상에 올라, 테르메소스 도시 유적의 백미인 석조 극장을 마주했다. 해발 1,000미터 산 기슭에 석회암을 깎아 만든 4,000~5,000석 규모의 원형 극장이었다. 올라오는 동안에도 군데군데 유적의 흔적을 보긴 했지만, 그 높이를 실감하진 못했다. 그러나 극장 위에 서서 탁 트인 절벽과 맞닿은 풍경을 마주하자 비로소 ‘해발 1,000미터의 도시’라는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곳에 도시를 세웠던 것일까?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진 이 극장은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듯한 아슬아슬한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는 산의 자연 경사면을 깎아 만든 구조지만, 관중석 끝에서 내려다보면 그 아래로 펼쳐진 계곡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마치 절벽과도 같은 극장의 맨 윗줄에 서자, 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스쳤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세찬 바람에, 순간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아 무서웠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눈물 찔금 콧물 찔금 흘리며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그 와중에도 아이와 풍경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남편과 아이의 뒤를 따라가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자리에 앉아 둘의 탐험을 지켜봤다. 역시 아들은 아빠를 닮아, 날다람쥐처럼 금세 오르락내리락했다.
솔직히 나처럼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기에 있던 관광객 중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풍경이 한눈에 시원하게 내려다보이긴 했지만, 막상 아주 위험하게 가지 않는 한 실제로 절벽처럼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던 것. 물론, 내겐 충분히 절벽이었지만... 고소 공포증이 한 몫 했다.
테르메소스는 고대 로마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피시디아 지역의 산악 부족, 솔림족(Solymi) 의 요새 도시였다고 한다. 솔림족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도 등장하는데, 피시디아의 험준한 산악 지형 속에서 살아온 부족들은 전반적으로 호전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테르메소스를 정복하려 했지만, 도시가 워낙 높은 산악 지대에 위치하고 천연 요새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결국 공격을 포기했다고 한다. 직접 와보니 정말 그럴 법 했다.
이후 테르메소스는 로마 제국과 협정을 맺어 자치 도시 형태로 속주에 편입되었고, 1세기부터 3세기 사이 로마 시대의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 곳의 유적도 바로 그 로마 제국 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5세기에서 6세기 무렵, 지진으로 주요 수로가 끊기면서 번영의 시간은 멈춰버렸다고 한다. 산 위의 도시였던 만큼 물길이 끊기자 사람들은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테다. 그렇게 테르메소스는 시간이 멈춘 도시, 폐허 속의 신비로 남게 되었다.
초기 로마 제국 시대 배경인 성경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약 A.D. 46–48) 중 피시디아의 험준한 지역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확히 이 테르메소스 도시를 지난 것은 아닐테지만, 피시디아의 험준한 토로스 산맥을 넘는 험준한 경로를 도보로 이동했던 것이다.
참고로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루트는 시리아의 안디옥 → 키프로스 섬 → 밤빌리아의 버가(페르게 Perge) 항구 in → 비시디아의 안디옥 → 루가오니아의 이고니온 → 루가오니아의 루스드라 → 루가오니아의 더베 → 그리고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 버가를 지나 → 아탈리아(안탈리아 Anttalya) 항구 out이다. (사도행전 13-14장 해당)
실은 남부 터키 여행을 오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인데 이번 여행에서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루트와 조금 겹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특히 버가에서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내가 아주 맛보기로 맛본 토로스 산맥으로 인한 해발 수천미터에 달하는 험준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당시 바울과 바나바가 목숨을 걸고 이 험준한 산맥을 넘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건너갔다. 거기서 요한(마가)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가를 떠나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갔다. 안식일이 되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ㅡ 사도행전 13:13-14
성경에는 이렇게 그냥 한 줄로 '버가를 떠나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갔다.'라고 되어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해안 지방 버가에서 내륙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려면 토로스 산맥의 이 험준한 지형을 넘어야만 했던 것이다! 맙소사. 현대인에게도 이 길은 너무도 어려운데, 당시 고대 여행자에게 이 길을 걸어서 넘는다는 것은 얼마나 험준하고 목숨을 건 여행이었을까?
나는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신자들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또 수고하고 애쓰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수없이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기도 하였습니다. ㅡ 고린도후서 11:26-27
학자들은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말한 자연적 위험과 강도의 위험이 바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목, 즉 토로스 산맥의 험난한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한다. 실제로 동행했던 마가가 그 중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도 이 험준한 산길을 넘는 데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한 바울이 자주 언급한 ‘육체의 가시’ 역시, 이 무렵 그 험난한 여정 속에서 얻은 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산악 지대에서 발생한 안질에 걸렸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의 가시는 어쩌면 피시디아의 산맥을 오르내리며 생긴 고통의 흔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결국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앉아서 터키식 초코파이 하나를 먹은 후 정신을 차렸다. 바람이 부는 관람석 끝 쪽으로만 가지 않으면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물론, 다리가 후들거려서 가파른 계단에서 넘어질까봐 또 무섭긴 했다. 그래도 그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겨, 나중엔 찬찬히 무대 쪽으로 내려가 구경도 하고, 하늘빛과 산맥을 배경으로 가족사진도 한 장 남길 수 있었다.
새삼 놀라웠다. 이렇게 해발 1,000미터의 높은 고지대에, 한때 수천 명이 모여 살며 도시를 이루었다니. 그리고 이 험준한 산악 지형을,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어갔다는 사실이 더 강하게 온 몸으로 느껴졌다.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 당시 기준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던 그는 왜 이런 험한 길을 택했을까? 1차 전도 여행에서 그렇게까지 고생을 했으면서도, 어떻게 2차와 3차의 선교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걸까?
생각해보면 바울이 남긴 여정의 발자취는 종교적 선교의 차원을 넘어 훗날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국교화와 유럽 문명과 사상, 그리고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 길 위에서 시작된 고된 움직임이 긴 세월을 지나 하나의 거대한 문화와 역사로 이어졌다는 것이 이 험준한 산 위에서 새삼 실감되었다.
자연과 역사가 한데 엉켜 있는 풍경 속에서 ㅡ 그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게나마 몸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더없이 벅찬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