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믿음이란....
내가 종종 대화 중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가 겪어온 감정적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 때문이다. 내면의 불안과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효과적이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현실을 회피하거나 신념에 갇히게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동안의 신념과 종교적 경험을 점검하며 현실에서 벗어난 신념에 빠지지 않도록 자아를 단속하려 한다.
1993년 고3 때 있었던 일이다. 나는 제법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부탁으로 몰래 수업을 빠져나와 한문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기독교인이었고, 수업 중 종종 성경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우리는 선생님의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고등학교 생활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 친구들과의 갈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자신의 고민과 두려움을 선생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너는 혼자가 아니야. 하나님이 항상 너와 함께 하신다는 걸 기억해”라며 믿음을 통해 그녀의 고통을 위로하려 했다.
수업시간에 생애 처음으로 무단으로 빠진 이 일을 나는 가벼운 모험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그 후 친구는 교회 부흥회에 가느라 며칠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는 일이 생겼고. 나와 점차 멀어졌다.
그 이후, 또 다른 충격적인 일이 나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중학교 때 공부도 잘하고 잘생겨서 인기 많았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친구의 어머니가 이단 종교에 빠졌고, 그 친구도 어머니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고 했다. 어느 날 가족 싸움 끝에 친구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 친구가 환하게 웃고 떠들던 모습을 동경하며 바라보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손이 떨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친구의 죽음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네가 믿었던 신은 왜 너를 구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수많은 질문 끝에 나는, 종교가 때때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니던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하루는 외가가 발칵 뒤집혔다. 스님이신 큰 이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외숙모에게 화를 냈다. 큰 이모 꿈에 외할아버지 나타나 계속 ‘가슴이 답답하다’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반복되는 꿈이 기이했던 큰 이모는 외할아버지의 무덤을 열었고, 외할아버지 가슴에 얹힌 성경책을 발견했다. 교회에 다니던 외숙모가 외할아버지가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기도하며 한 행동이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또 생각에 잠겼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구나!’
‘고인의 생전의 믿음을 존중하지 않고 내 믿음을 강요하면 안 되는 거구나!’
성인이 된 이후, 나는 기회가 되면 유명한 사찰에 가기를 즐겼다. 사찰에 가서 천 원을 내고 삼배를 드리며 온갖 소원을 들어달라고 빌었다. 어머니께서 점집에서 무속인에게 들었다며 하시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이 시기에 간증 문학도 많이 읽었다. 지옥 같은 삶에서 하느님을 믿고 신비로운 체험을 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간증은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살았기 때문인지, 이런 삶이 모순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부동산을 접었던 나는 2008년, 제1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실습에 참여했다. 자격증 발급 기관은 교회에 있었고, 강사는 목사님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모인 이들 대부분이 교인이었다. 실습 중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같이 공부하던 분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어도 될까요?”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분은 내 배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진지하고 경건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평화롭고 따뜻한 말들로 축복을 전했다.
“하나님께서 이 아기에게 건강과 행복을 주시고, 엄마와 아빠가 이 아이를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축복을 건네는 그는 생명과 신앙이 교차하는 신성한 순간의 산증인과도 같았다. 서슴없이 누군가를 축복해 주는 그의 행동은 놀라웠고 감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내 아이도 그런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아이를 키우는데 신앙생활이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꿈속에서, 나는 작은 개울이 흐르는 곳에 서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하고 잔잔하던 물이 어느새 강하게 밀려오는 듯했고, 표면에는 작은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의 시선에 물에 떠내려가는 성경책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십자가도 떠내려갔다. 이 장면은 나에게 새로운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는 강렬한 직감을 느끼게 했다.
2025년 3월, 신학대학을 다니는 지인과 대화 중에, 내가 성경과 십자가가 물에 떠내려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경과 십자가는 생명인데, 그게 떠내려가면 죽음이지.”
실제로 나는 그 꿈을 꾸고 나서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롭고 두려운 일을 겪었다. 그래서 그 후 오랫동안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 꿈을 이렇게 해석했다.
‘교회 다니지 말고 절에 다니라는 뜻이구나!.’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나는 불경과 불교 영험담을 찾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분명 불교에도 성경과 같은 경전이 있을 텐데, 기독교 간증처럼 불교를 믿고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사람들의 영험담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기독교인들과 달리 스스로 불자라고 나서는 이들이 없는 사회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구하기 위해 간절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아는 불법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 하면 극락에 간다는 것이었으므로.
이 염불은 나에게 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법공양한 ‘고승의 법문곡’과 ‘무상계’, 그리고 생활 속의 반야심경을 가져다주었다.
*법공양 하신 자손들의 공덕으로 선망 조상님들, 지금 이 순간, 있는 자리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성불하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광명진언 3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