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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극복했다는 뜻이다

by 엄마쌤강민주

1994년 가을, 나는 왼쪽 종아리뼈가 3 동강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하기 위해 다리의 부기가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길게만 느껴졌다. 하루는 홀로 병원 탐방에 나섰다. 병원 복도는 조용하고 차가운 공기가 돌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움직이는 내 몸은 무겁고 어색했다. 왼쪽 다리에는 깁스가 감겨 있어 그 무게가 부담스러웠고, 얼굴과 온몸은 온통 붓고 붉어져 있었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키가 큰 잘생긴 오빠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병원 복도의 안전바를 잡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침착하고 우아했다. 다들 나처럼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고 퉁퉁 부은 얼굴로 유령처럼 병원을 떠도는 모습만 보다가, 그 오빠를 보니 전혀 부상 중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병원복조차도 그를 조금 더 부드럽고 단정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가 걷는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한 나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며 숨을 삼켰다. 나는 온몸이 부어있고 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묘한 설렘이 일었다. 그는 온화하고, 우아하게 병원 복도를 걸었다. 나는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고요하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오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는 23살의 대학생이었다. 내게는 완벽해 보였던 그가, 사실은 교통사고로 발뒤꿈치가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충격이 몰려왔다. 그 멋진 오빠가 평생 절뚝이며 살아야 한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에 대해 알게 된 후, 내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사고 전에는 멀쩡했던 그가, 사고 후 평생을 절뚝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나도 이 부상으로 인해 걷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과 걱정이 밀려왔다.


전신마취로 수술을 했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 후,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떴다. 서서히 주변의 빛과 소음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몸은 너무 무겁고,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특히, 감당하기 힘든 추위가 느껴지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치아가 가볍게 부딪히고, 손과 발끝은 차가워졌다. 누군가 나를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나는 이 수술로 내 손으로 한 뼘 정도 되는 커다란 수술 자국을 흉터로 가지게 되었다.


병원 창밖으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병원 침대에 앉아 부모님을 맞이했다. 부모님은 커다란 수술 자국을 보며 “여자가..., 어쩌니?”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이만하기 다행이야”라고 말하고 손으로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동안 어머니와 친구에게 ‘너는 커다란 칼자국이 있을 팔자야’라는 말을 듣고 상상하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 흉터쯤이야....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어느 날, 나는 예쁘고 짧은 치마를 입고 한껏 기뻐하며 거리를 걸었다. 내 다리는 예전처럼 자유롭고, 그 위에 내리쬐는 햇볕은 무척 상쾌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무속인이 말한 ‘칼자국’이 마음에 걸려, 나에게 쌍꺼풀 수술을 시켜주었다. 나에게 ‘착하다 생겼다’라고 하던 말이 어느새 ‘예쁘게 생겼네’라고 바뀌었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사람들은 나의 환한 미소에 더 환하게 웃어 주었다.


누구도 내 다리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6살 때 오른쪽 무릎 뒤를 개에게 물려 그곳에도 커다란 흉터가 있다. 무릎 뒤라 잘 보이지 않음에도 나는 그 흉터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교복 치마를 어울리지 않게 길게 입은 것도 다리의 흉터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나의 왼쪽 다리에 오른쪽 다리의 흉터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흉터가 생겼다. 왼쪽 종아리 안쪽에 생긴 흉터는 커다란 붉은 지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수술이 남긴 흉터보다 수술로 인해 내가 제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더 감사했다. 매일 내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마음 깊이 새기며,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흉터에게도 말했다.

“네가 상처를 잘 극복해 주어서 내가 오늘 걸을 수 있어, 고마워.”


이 사건으로 나는 사고로 후천적인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고, 이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변호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장애인식개선 강사나 인권센터의 인권 기자 그리고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하면서 나부터 장애인을 무시하지 않고 장애인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서 흉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치맛자락을 들추고 “이렇게 큰 흉터가 안보였어요?”라고 물은 적도 있다.

“다리에 흉터가 있는 사람이 치마를 입을 거라고 생각 못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은 워낙 말을 잘하니, 말하는 얼굴을 보지 선생님의 다리를 보진 않았죠.”


2019년 한밭자립생활의 날 기념식에서 내가 쓴 글이 실린 소책자를 들고 찍은 기념사진


2019년 장애인시설에서 강의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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