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의 아픔
2006년, 부동산 사무실에서 실장으로 일하던 나는 예상치 못한 유산을 경험했다. 그 아픔은 내 내면을 깊은 상처와 슬픔으로 물들였다. 사장님은 나를 위로하며, 단골 무속인 집으로 데려갔다. 신당 앞에서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고요한 그 공간은 향내로 채워져 있었고 촛불들이 너울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그곳에 놓인 제물들과 알록달록한 신들의 모형을 보고 나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이 공간에 깃들어 있다는 강한 직감을 느꼈다. 이 감정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신령에 대한 경외감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롭고 신성한 영역을 대하는 두려움이었다. 이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 했으나, 사장님과 무속인이 나를 위해서라며 굿을 권할 때,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직접 굿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70만 원을 주고 굿을 맡겼다. 그 금액은 당시 내가 부동산 실장으로 받는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굿이 끝난 후, 무속인은 나에게 몸을 살짝 기울이고 손끝으로 입을 가리며 사장이 들을 수 없도록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사장하고 틀어질 일이 있을 거예요. 당신에게 운이 들었으니 그냥 그 사무실에서 나오세요.”
무속인의 말에 어깨가 움츠러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속인의 얼굴에는 그 어떤 확신과 동시에 경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내 눈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무속인의 예언대로 사장님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사장은 내가 유산한 사실을 공격의 도구로 삼으며,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라는 말을 했다. 신령스러운 존재에게 굿을 권할 정도로 그동안 나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해해 주던 사람이, 내 아픔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목에서 이물감이 느껴지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에게 반격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지지해 주던 사람이 등을 돌린 것에 대한 배신감은 말을 앗아가 버렸다.
이후 나는 그 부동산을 떠나 나의 부동산을 차렸다. 때때로 내 눈길은 내가 성사시킨 수많은 계약서와 문서들이 늘어놓여진 책상 위에 멍하니 머물렀다. 그런 날이면 깊은 한숨 속에서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마음은 오랫동안 그 말 한마디에 묶여 있었다. 반복해서 유산을 겪을 때마다 그 말이 불타는 쇠꼬챙이가 되어 나를 건드리고 찔렀다.
그 상처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여자가 아이를 유산하면 부끄러운 일인가?, 나에게는 죽을 만큼 아픈 상처가 누군가에게는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약점인 걸까?’, 그 상처가 생긴 것은 나의 잘못이었을까?, 잘못한 사람은 상처 입혀도 되는 걸까?
그 후, 무속인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것을 경험한 나는 무속에 대해 경외감이 생겼다. 그러나 아이를 갖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아이 대신 새 사무실과 사업적 성공을 준다고 한 것이 의아했다. 더구나 공수로, 굿을 추천해 준 사람과 그로 인해 굿을 한 사람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나온 것도, 오래도록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이런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상처는 천사가 입어도 아프고 악마가 입어도 아프다. 그 아픔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상처는 그 무엇이든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그것을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말자.”
그 후, 내 상처를 공유하며, 같은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지지를 전하고자 노력한다. 상처 입었던 과거의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간절히 원했던 위로와 지지를. 또한 나는 당신이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고 상처를 치유할 충분한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미래의 언젠가의 나 또한, 당신의 위로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이 세상을 신뢰하며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